[문재인 정부-이명박 ‘적폐청산’ 충돌]공항서 3분 36초간 작심 비판
격앙된 MB 이명박 전 대통령이 12일 강연을 위해 바레인으로 출국하는 길에 인천국제공항 귀빈실 앞에서 기자들과 만나 현 정부의 ‘적폐청산’ 작업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인천=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
12일 낮 12시 인천국제공항 귀빈실 입구 앞. 이명박 전 대통령이 2박 4일 강연 일정으로 바레인 출국을 위해 공항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100여 명의 기자가 일제히 플래시를 터뜨렸다. “기자 여러분들이 많이 나오셨기 때문에 짧게 몇 말씀만 드리겠다”며 입을 연 이 전 대통령은 원고 없이 3분 36초 동안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드라이브를 강하게 비판했다.
○“감정 풀이와 정치 보복”→“갈등, 분열 깊어져”
이 전 대통령의 메시지는 글자 수로만 보면 1000자가 조금 안 된다. 그러나 그 주제는 문재인 정부의 제1국정과제인 ‘적폐청산’에만 초점을 맞췄다.
특히 이 전 대통령은 “우리 외교안보에 위기를 맞고 있다. 이런 가운데 군의 조직이나 정보기관의 조직이 무차별적이고 불공정하게 다뤄지는 것은 우리 안보를 더욱 위태롭게 만든다”고 강조했다. 바레인행에 동행한 이동관 전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은 “잘못된 것이 있다면 메스로 환부를 도려내면 되는 것이지 전체 손발을 자르겠다고 도끼를 드는 것은 국가안보 전체에 위태로운 일”이라고 덧붙였다. 군 사이버사령부와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를 범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댓글 지시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이 전 대통령은 “상식에서 벗어난 질문은 하지 마세요. 상식에 안 맞아”라며 불쾌해했다.
권재진 전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이명박 정부)은 통화에서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이 구속된 것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좀 더 심각해진 상황이라고 보고 있다. 이제 가만히 있을 단계가 아니라 할 얘기는 해야 할 단계라고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 5시간 구수회의 “평소 울분의 반만 담아”
이 전 대통령은 토요일인 11일 오전 8시부터 5시간 동안 서울 삼성동 사무실에서 옛 청와대 참모진을 불러 구수회의를 했다. 메시지의 강도나 분량, 구체적인 문구를 놓고 장시간 회의가 이어지면서 일부 참모는 도시락을 배달시켰다고 한다. 당초 결정된 메시지는 공개된 것보다 강도는 더 세고, 길이는 짧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 핵심 참모는 “이 전 대통령이 이런 사안에 대해선 결기 있게 해야 한다, 정면 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시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날 메시지 강도가 당초 회의 때보다 낮춰졌고 분량은 좀 더 길게 조정되긴 했지만 추석 때에 비하면 수위가 크게 높아졌다. 적폐청산에 대해 ‘감정 풀이’ ‘정치 보복’을 언급한 이 전 대통령은 “한 국가를 건설하고 번영케 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파괴하고 쇠퇴시키는 것은 쉽다”고 했다. 적폐청산을 사실상 나라를 건설하기보다는 파괴하는 국정운영으로 규정지은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새로운 정부가 들어와서 오히려 사회 모든 분야가 갈등이, 분열이 깊어졌다고 생각해서 저는 많은 걱정을 하고 있다”고도 말했다.
최금락 전 홍보수석은 통화에서 “평소엔 더 울분을 갖고 있었다. 이 정도면 그 반 정도밖에 안 됐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이 전 대통령은 추후 기자간담회 등을 통해 추가 입장을 밝힐 가능성도 있다.
○ 청와대 무대응 속 상황 예의주시
청와대는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 주재로 현안점검회의를 가졌지만 무대응 방침을 정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을 수행 중인 윤영찬 국민소통수석비서관도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청와대가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 문제가 ‘보수 대 진보’의 전면 대결 양상으로 번지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분열된 보수 진영이 빠르게 결집하는 것은 청와대에도 부담이다. 자칫 ‘전(前) 정권을 넘어 전전(前前) 정권까지 겨냥하는 정치 보복’이라는 프레임을 부각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정면 충돌로 치달으면 정치 공방에 발목이 잡힐 수밖에 없다. 내년부터 본격적인 정책 드라이브로 나서야 하는데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도 1일 국회 시정 연설에서 적폐청산 대신 ‘국가 혁신’을 새롭게 꺼내 든 바 있다. 그러나 검찰 수사가 어느 쪽으로 흐르든 정치적 부담은 고스란히 청와대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정원수 needjung@donga.com / 영종도=송찬욱 / 한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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