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르타엔 ‘스파르타’ 없어… ‘300’ 무대 테르모필레도 방치
페르시아戰 승리 이끈 영웅… 포퓰리즘과 衆愚정치로 추방되거나 죄인으로 죽어
주권국가 決意 부족하거나 토사구팽 정치보복 판치면 그리스 현실 남 얘기 아냐
박제균 논설실장 |
스파르타엔 ‘스파르타’가 없었다. 지난달 말 찾아간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 깊숙이 자리한 스파르타는 지방 소도시에 불과했다. 이른 저녁이었지만 불 꺼진 거리는 한산했고, 손바닥만 한 도심에만 주말을 즐기러 나온 젊은이들이 눈에 띄었다. 어디를 봐도 고대 그리스에서 아테네와 패권을 다퉜던 도시국가의 영광, 영화 ‘300’이 웅변한 전사(戰士) 나라의 자취는 느껴지지 않았다.
다음 날 오전에 찾은 고대 유적지도 마찬가지였다. 오죽하면 사학자들이 왔다가 ‘여기가 과거 스파르타 맞아?’라고 실망한다는 곳이 됐을까. 고대 스파르타는 아이들도 병영생활로 키우고 살인까지 요구하는 성인식을 거칠 정도로 지나치게 무(武)를 숭상했다. 일체의 기록이나 문화를 사치로 여겨 별로 남길 것이 없었다는 설명을 들었지만, 허전하긴 매일반. 유적지 앞에 세워진 ‘300’의 주인공 레오니다스 왕의 동상조차 다소 뜬금없어 보일 정도였다. 동상 기단부에는 그리스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몰론 라베(Molon Labe)’.
기원전 480년 8월 레오니다스가 지휘하는 그리스 연합군 1만 명은 테르모필레에서 20만 명의 페르시아 대군과 맞닥뜨렸다. 1만 명이라고는 하지만 보조병력이 대부분이었고, 전사로 키워진 스파르타의 300명이 정예군이었다. 페르시아 크세르크세스 왕은 가소로운 병력으로 막아서는 그리스 진영에 이렇게 전했다. “무기를 거두면 돌아가도 좋다.” 페르시아 사절을 맞은 레오니다스의 답변. “몰론 라베(와서 가져가라).”
역사적인 테르모필레 전투의 결과는 영화에 표현된 그대로다. 왼쪽으로는 깎아지른 듯한 산, 오른쪽으로는 바다로 떨어지는 낭떠러지의 협로(峽路)에서 대군을 맞은 그리스 전사들은 페르시아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전멸했다. 에피알테스라는 그리스인이 크세르크세스 왕에게 산을 돌아 레오니다스 진영의 배후를 칠 수 있는 샛길을 알려줬다. 포위공격을 당한 그리스군은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에피알테스는 오늘날 그리스어로 ‘악몽’이라는 뜻. 배신자의 오명(汚名)은 2500년이 돼도 선명하게 남았다.
테르모필레 전투의 현장은 애써 찾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울 정도로 방치됐다. 도로 옆에 조그맣게 마련된 게시판과 레오니다스 동상만이 동서양이 쟁패(爭覇)했던 그날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우선 지형부터 확 달라졌다. 바다로 떨어지던 절벽은 2500년이 지나면서 육지화돼 해안선이 몇 km나 바다 쪽으로 전진했다. 전장은 더 이상 협로가 아니라 평원이었다.
스파르타든 테르모필레든 나 같은 한국인도 애써 찾을 정도의 역사 현장이 방치된 것은 오늘날 그리스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은 듯했다. 국가 부도를 맞은 그리스의 관광수입 대부분이 부채를 갚는 데 쓰인다고 했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입장료도 채권국 독일로 간다는 게 현지 가이드의 설명이었다.
다시 고대로 돌아가면, 테르모필레 전투는 개전 초 페르시아의 예봉과 전의(戰意)를 꺾고 도시국가 연합인 그리스를 단결시켰다. 이 점에서 2차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견인차였다. 거기서 승기를 잡은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패퇴시킨 것이 그 유명한 살라미스 해전. 당시 그리스 안에도 ‘흙과 물을 바쳐 충성맹세를 하라’는 페르시아에 굴복하려는 기류가 팽배했다. 이를 설득해 전의를 다지고 해전을 승리로 이끈 또 다른 영웅이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였다.
늘 그렇듯, 역사는 해피엔드로만 끝나지 않는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 중우(衆愚)정치의 대명사인 도편추방의 희생자가 돼 그리스 전역을 전전하게 된다. 결국 적국 페르시아에 몸을 의탁하는 처지로 전락해 거기서 생을 마감했다. 기원전 490년 1차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밀티아데스에게 닥친 운명도 비슷했다. 밀티아데스는 “우리 자식을 페르시아의 노예로 만들 거냐”는 사자후로 두려움에 떠는 아테네인들에게 용기를 주고 마라톤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그런 밀티아데스도 정적들의 고발로 막대한 벌금형을 선고받아 죄인으로 죽었다.
2500년 전 서양의 일이지만, 사람 사는 세상의 이치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 안에도 페르시아의 무력에 떨었던 그리스인들처럼 “그럼 전쟁하자는 거냐”며 공포를 부추기는 지도자들이 득세하고 있다. 주권국가로서의 당당한 결의를 다지는 목소리는 미미하다. 국내 정치적으로도 포퓰리즘과 중우정치가 만연돼 토사구팽(兎死狗烹)과 정치보복의 칼춤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스는 민주주의 발상지이자 고대 세계의 최고 선진국이었다. 그런 나라가 이후 2000년 동안 국가도 없이 헤매다 오늘날 빚더미에 허덕이는 현실은 남의 얘기로만 치부할 수 없다.
박제균 논설실장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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