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외교관들은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에서도 주류 밀매를 일삼아온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2013년 6월 카라치에서 현지 세관당국이 압류한 밀수 양주를 폐기하기 직전의 모습이다. 사진 출처 PRI 홈페이지 |
박민우 카이로 특파원 |
“술은 먹고 다니냐?”
중동 지역 특파원으로 지내다 보니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서 왕왕 이런 애틋한 문자 메시지를 받곤 한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집트 인구의 90%가 술을 먹지 않는 무슬림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나는 한국에서보다 더 풍족한 음주생활을 즐기고 있다. 웬만한 동네마다 하나씩 있는 ‘드링키스’라는 주류 판매점에서 맥주와 위스키, 보드카, 와인 등 각종 주류를 팔고 있기 때문이다.
12일까지 출장차 머물렀던 파키스탄도 사정이 비슷했다. 1860년에 영국이 만든 양조업체 머리가 맥주와 위스키를 생산하고 있어 외국인들은 술을 접할 수 있었다. 무슬림 인구가 97%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탓에 제한 규정이 엄격했다. 술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고 고품질 술을 찾기 어렵다 보니 파키스탄은 암시장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최근 파키스탄에서는 황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수도 이슬라마바드 주재 북한대사관에 근무하는 현기영 1등 서기관은 지난달 3일 자신의 집에 보관하던 조니워커 블랙 위스키 1200병, 와인 200상자, 맥주 60상자, 데킬라 수십 병, 다이아몬드 2개와 현금 3000달러(약 336만 원) 등을 도난당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암시장 거래가를 고려할 때 도난당한 물품의 가치는 15만 달러가 넘는다. 면세점에서 보통 35달러인 조니워커 블랙은 파키스탄 암시장에서 80달러에 팔린다.
더 웃긴 건 현 서기관의 집을 턴 일당들이 현직 파키스탄 경찰관이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현 서기관의 집사인 부타 마시와 짜고 그가 집을 비웠을 때를 노렸다. 당시 폐쇄회로(CC)TV에 포착된 경찰관 말릭 아시프는 도피 중에 “북한 외교관들은 오랫동안 주류 밀매 사업을 해왔다”고 로이터에 털어놨다. 절도범이 경찰이란 사실이 확인되자 현 서기관은 수사를 원치 않는다며 신고를 취소했다.
파키스탄에 주재하는 1등 서기관은 분기당 위스키 등 증류주 120L, 와인 18L, 맥주 180L를 면세로 들여올 수 있다. 대사의 경우 면세 주류의 할당량이 1등 서기관의 2배 수준이고, 북한 외교관이 최대 14명이 근무하는 것으로 알려져 반입 규정을 어겼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많은 술을 자기들끼리만 마시려고 보관했을까. 파키스탄에는 북한 교민이 거의 없는 데다 양국 간의 무역은 지난해 8월 공식 중단된 상황이다.
미심쩍은 게 또 있다. 파키스탄 주재 북한대사관은 지난해 3월부터 12월까지 10개월 동안 아랍에미리트(UAE)의 트루벨이라는 회사에 주류를 주문했는데 그 양이 웬만한 유통업체 이상이었다. 이들은 4차례에 걸쳐 프랑스 보르도 와인 1만542병, 하이네켄과 칼스버그 1만7322캔, 샴페인 646병 등 총 7만2867달러어치를 수입했다. 그 많은 술이 어디로 갔을까.
파키스탄 현지 언론은 북한 외교관들의 주류 밀매 의혹을 수년째 단골로 다뤄왔다. 올해 4월에는 파키스탄 남부 카라치 소재 북한 외교 공관에서 보관 중이던 불법 양주가 세무경찰에 압류되는 사건이 있었다.
당시 일부 세무경찰은 북한 외교관이 주류 밀매조직과 결탁해 불법 반입된 막대한 양의 술을 공관에 숨겨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들은 불법 주류를 가로챌 목적으로 소속 부서와 관계 기관에 알리지 않고 북한 공관을 급습해 일부 주류를 압류해갔다. 그러나 강성군 북한 무역참사는 “세무경찰 10명이 북한 공관을 무단으로 침입해 외교관과 배우자를 학대했다”며 세무경찰청장에게 항의 서한을 보내 빼앗긴 술을 돌려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외교관의 주류 밀매 실태를 탐사 보도한 데일리 오사프의 무나와르 피르자다 기자는 “북한 외교관들은 주류를 밀매하는 것뿐만 아니라 밀수업자가 반입한 주류를 공관에 보관해줌으로써 수수료까지 받아 챙기고 있다”고 말했다.
카라치에 주재하는 한국 외교관이 3명인 데 반해 북한 파견 인원은 7명이나 된다. 파키스탄의 최대 교역국인 중국(10명)과 큰 차이가 없다. 이쯤 되면 북한 외교관들의 주류 밀매는 공관 운영비와 생활비 등 단순히 생계 활동 차원이 아니라 충성 자금 상납을 위한 조직적인 활동이라는 데 무게가 실린다.
파키스탄뿐만이 아니다. 북한의 6차 핵실험 이후 수출길이 막히면서 전 세계에 주재하는 북한 외교관들과 무역회사가 주류와 마약 등 각종 밀매 사업에 더욱 열을 올릴 게 뻔하다. 목숨을 걸고 외화벌이에 나선 그들에게 묻고 싶다. 밥은 먹고 다니냐고.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박민우 카이로 특파원 min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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