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정 문화부 기자 |
윤이상에 대한 틀은 분명했다. 67년 동백림 사건 전까지 윤이상은 ‘유럽에서 한국을 알리는 작곡가’였다. 신문사마다 정리하는 연말의 문화계 뉴스에 한 줄 정도 이름을 올렸다. 중앙정보부가 동백림 사건의 수사 결과를 발표한 67년 7월부터 기조는 바뀌었다. 신문 지면에는 그의 한국·독일 주소뿐 아니라 본적·범죄사항이 한 면 빼곡히 실렸다.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70년부터 윤이상은 국위선양 예술가의 지위를 다시 획득했다. 특히 72년 뮌헨 올림픽의 개막 기념작으로 오페라 ‘심청’을 작곡하면서 언론은 그를 세계적 행사에 한국의 이름을 올린 예술가로 기록했다.
왜 음악인가 11/13 |
윤이상은 95년 독일에서 사망했다. 평생 그리던 고향 통영에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비극적 예술가로 묘사된다. 별세 이후 윤이상에 대한 기사에는 낭만적 추모가 넘실댄다.
윤이상을 보는 시각은 ‘국위선양자’와 ‘이적행위자’ 사이를 맴돌았다. 언론뿐 아니라 사회의 시각이 그렇다. 이쯤 해서 다른 질문을 해 보자. ‘그런데 도대체 어떤 음악을 썼길래?’ 최근 세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작곡가 진은숙은 예전 인터뷰에서 “내 이름이 유명하긴 하다. 하지만 내 곡을 듣고 좋다 싫다 취향을 가진 사람은 한 줌”이라고 말했다. 사회가 예술가를 보는 방법은 정곡을 찌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윤이상 탄생 100주년이 지나간다. 예산이 깎여 열리지 못할 뻔했던 윤이상 국제음악콩쿠르는 이달 초 다행히 치러졌고 서울시·경기도가 지원한 윤이상 해외 연주도 무사히 끝났다. 하지만 윤이상에 대한 취향을 발견하게 된 사람은 얼마나 늘어났을지, 분명하지 않은 채로 100주년이 끝나고 있다.
김호정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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