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7.03 (수)

기발한 상상력, 새로운 앵글로 일상이 예술이 될 때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요즘 미술이 난해하거나 심오한 것만은 아니다. 서울 도심의 미술관 두 곳에서 각각 새로 시작한 전시도 그렇다. 각각 웃음을 부르는 재미, 낯익고 친근한 느낌이 두드러진다.

감자칩과 기발한 상상력이 만나다, 테리 보더 개인전 '먹고 즐기고 사랑하라'


중앙일보

테리 보더, 씨리얼 킬러 Cereal Killer 사진=사비나미술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서울 안국동 사비나미술관의 '테리 보더-먹고 즐기고 사랑하라'는 기발한 상상력과 유머가 번득이는 전시다. 예컨대 한 작품에선 살인현장처럼 사람이, 아니 철사를 구부려 사람처럼 팔다리를 만들어 붙인 시리얼 조각이 피 대신 우유에 흠뻑 젖은 채 쓰러져 있다. 다른 두 사람, 아니 두 시리얼 조각은 충격을 받은 듯 이를 지켜본다. 시리얼을 비롯한 실제 사물을 활용해 찍은 이 사진작품 제목은 '시리얼 킬러'. 연쇄살인범을 뜻하는 ‘Serial Killer’의 앞글자를 같은 발음이자 아침식사 대용품인 ‘시리얼(Cereal)’로 바꾼 것이다.

중앙일보

자신의 작품 &#39;미켈란젤로의 검지&#39; 옆에 선 테리 보더. 사진=사비나미술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활동 중인 테리 보더(52)는 이처럼 유머가 번득이는 사진들로 인터넷에서부터 대중적 인기를 누려왔다. 그의 사진은 감자칩, 레몬, 바나나, 쿠키, 두루마리 화장지의 심, 숟가락, 양초 같은 것에 철사로 팔다리를 붙여 사람처럼 등장시키는 데다 영화 장면처럼 매번 뚜렷한 스토리가 담겨 쉽게 눈길을 사로잡는다. 제목도 재치있다. 엄마에게 쓴 편지를 손에 쥔 든 달걀이 망연자실 통닭구이 앞에 서 있는 모습은 '너무 늦은 만남(Belated)'이, 뜨개질용 대바늘 두 개가 꽂힌 털실 뭉치에서 두 가닥 빨간 실이 흘러내린 모습은 ‘피눈물을 흘리다(A Horrific Yarn)'가 제목이다. 작고 낯익은 사물을 활용해 때론 야한 영화 같은 장면까지 연출해 웃음을 부른다.

중앙일보

테리 보더, 너무 늦은 만남Belated 사진=사비나미술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테리 보더, 까발리기 Exhibition 사진=사비나갤러리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어려서 만화가를 꿈꾸기도 했는데 출판할만한 솜씨는 아니었어요." 전시를 위해 내한한 테리 보더의 말이다. 대신 사진을 전공, 상업사진가로 오래 일했던 그는 "일에 질려" 그만두고 2006년부터 지금 같은 사진을 만들어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일단 "만든다"는 게 그의 지론. 스스로 망설였던 작품이 오히려 좋은 반응을 얻은 경우가 많았단다.

중앙일보

테리 보더, 매끄러운 피부 관리 Smooth as Glass 사진=사비나미술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는 한국에서 미리 보내준 라면, 대추, 곶감 같은 먹거리도 등장한다. 모두 그에게는 낯선 것이었지만 이리저리 특징을 연구해 사진을 찍었다. 쭈글쭈글한 붉은 대추가 거울 앞에서 얼굴팩을 하는 '매끄러운 피부 관리(Smooth as Glass)'는 대추가 피부에 좋다는 얘기에서, 물에 뜬 라면 조각 위에서 삶은 달걀 반쪽들이 서로를 그리워하는 '슬픈 안녕(The End of Relationship)'은 그로서는 난생 처음 끓여본 라면이, 그 면발이 풀어지기 직전의 모습이 마치 "뗏목"처럼 보인 경험에서 나왔다. 전시장에는 큼직한 사진작품들, 그 바탕이 된 작은 모형과 스케치, 따로 만든 애니메이션 작품까지 자리해 작업과정을 짐작하게 한다. 12월 30일까지. 관람료 성인 기준 1만원.

중앙일보

사진 작품의 재료가 된 모형들 앞에 선 테리 보더. 사진=이후남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강공원과 새로운 앵글이 만나다, 이상원 개인전 'The Colors of the Crowd'


중앙일보

이상원, 군중The Crowd_200x350cm_acrylic on canvas_2015 사진=성곡미술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서울 신문로 성곡미술관이 올해 '내일의 작가'로 선정, 개인전을 마련한 이상원(39)은 상대적으로 젊은 화가다. 그의 특기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모습을 큼직한 화폭에 담는 것. 한강공원 수영장, 어린이대공원, 스키장, 전국노래자랑 녹화현장, 촛불시위나 태극기시위 현장 같은 낯익은 일상 곳곳에서 포착한 사람 많은 풍경을 때로는 옆에서 보는 듯, 때로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듯, 때로는 그 두 가지 앵글을 섞어 그린다. 잔디밭에 저마다 자리를 펴고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을 그린 ‘군중’의 전체 구도는 위에서 내려다 보는 듯 하지만 각각의 사람들은 옆에서 보는 듯 하다. “한국에선 안 그런데 서양에선 이상하단 말도 들어요." 전시장에서 만난 이상원 작가의 말이다.

중앙일보

작품 &#39;어린이대공원&#39; 앞에 선 이상원 작가. 사진=이후남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가 사람 많은 풍경에 매료된 건 반대로 사람 적은 곳에서 자란 덕분이다. “고향이 충남 청양, 노래에도 나오는 칠갑산이에요, 90년대초 서울로 이사와 제일 눈에 띈 게 사람들이 많은 거였어요. 야경과 사람들 풍경이 강렬했어요. 그런 충격이 없었죠.” 그래서인지 스키장에 모여든 사람들도 대낮처럼 환한 조명을 밝힌 밤 풍경으로 그려내곤 한다.

중앙일보

이상원, 수영장Swimming Pool_194x130cm_oil on canvas_2007 사진=성곡미술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제는 눈에 익은, 다양한 여가를 즐기는 모습들은 한편으로 그동안 달라진 시대상을 반영한다. “돌아보면 그 무렵부터 주5일제로 여가생활이 많아진 거죠. 봄에는 꽃구경, 가을에는 단풍구경, 여름은 수영장, 겨울은 스키장…사람들이 정말 비슷비슷하게 움직이더라구요.” 홍익대 미대를 나온 그는 2000년대 중반부터 가까운 성산대교에서 내려다본 한강공원 모습을 시작으로 사람들 풍경을 그려왔다. 사람마다 얼굴은 자세히 묘사하지 않는 것도 특징이다. “보는 분들이 ‘내가 아는 누군가’를 대입해 공감대를 만들 수 있는 여지인 거죠.” 하지만 이런 기법이 오히려 낯설고 기이한 느낌을 줄 때도 있다. 교복이나 제복처럼 꼭같은 차림으로 모인 사람들, 결혼식 기념촬영처럼 안 봐도 그릴 법한 전형적 모습으로 모인 사람들을 담은 그림에서다.

중앙일보

이상원, 학생들Students_80x116.5cm_acrylic on canvas 2016 사진=성곡미술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이상원, 군중The Crowd_72x91cm_oil on canvas_2017 사진=성곡미술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유화만 아니라 아크릴화, 특히 학창시절 누구라도 한번쯤 그려봤을 수채화를 즐겨 그리는 것도 그의 그림이 친근하게 느껴지는 이유로 보인다. 전시장에는 낱장의 수채화들, 최근 시도한 한결 추상적 기법의 작품들도 선보인다. 사람을 하나씩 그린 그림을 연결해 동영상으로 만든 작품도 눈길을 끈다. 자전거를 타거나, 조깅을 하거나, 훌라우프를 돌리는 등 동작마다 성별과 차림이 다른데도 다들 동네에서 봤음직한 이웃처럼 보인다. 11월 19일까지. 관람료 성인 기준 5000원.

중앙일보

이상원 작가 사진=성곡미술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모바일에서 만나는 중앙일보 [페이스북] [카카오 플러스친구] [모바일웹]

ⓒ중앙일보(http://joongang.co.kr) and JTBC Content Hub Co., Lt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