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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김대중·김정일의 건배주, 달큰하고 화끈한 문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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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유리병에 담긴 문배술. 자칫 고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전통주를 이토록 현대적인 디자인의 술병에 담았다. 술병 중간에는 도수를 눈에 잘 띄게 큰 글씨로 새겨넣었다. /사진=공식 홈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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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 술술 인생이 술술-24] 어렸을 때에는 전통주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거의 세뇌 당하다시피 했던 '신토불이(身土不二·제 땅에서 난 것이 체질에 잘 맞는다)' 사상과 무관하지 않았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계 각국의 온갖 술을 마시면서 내 안에 전통주의 신화는 자연스럽게 무너졌다. 술은 그냥 술일 뿐이며, 내 입에 맞는 술과 맞지 않는 술, 잘 만든 술과 대충 만든 술로 구분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주류코너에 가면 괜히 전통주 코너에서 기웃거리게 된다. 대단한 기대보다는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다. 대개 위스키, 코냑, 와인, 맥주 등은 아무리 개성이 있을지라도 특정 주종의 맛의 스펙트럼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전통주는 다르다. 종종 생각지도 못했던 맛이 나서 깜짝 놀라기도, 또 실망하기도 한다. 그 모든 과정이 하나의 즐거움이다.

문배술은 무형문화재다. 식품명인 이기춘 선생의 양조장에서 만든다. 제조사는 문배술의 역사가 1000년이 넘는다고 한다. 5대에 걸쳐 150년간 빚어왔다는 사실은 문서로 확인된다. 하지만 나는 어떤 술의 역사와 전통이 그 술의 가치를 결정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문화재로서는 몰라도. 결국 술은 음식이며 음식의 본질은 '맛'이다.

나로 하여금 문배술을 마시게 한 것은 그 재료였다. 문배술은 찰수수와 메조, 쌀을 증류해서 만든 술이다. 배가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야생배 '문배'의 맛이 난다고 해서 문배술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우리나라에서 잡곡을 증류해 만든 술은 문배술뿐이라고 한다. 그래서 선뜻 한 병을 집어 들었다. 대형마트에는 23도, 25도, 40도짜리 유리병에 든 문배술과 고급 자기에 든 선물용 문배술이 있었다. 내가 직접 마시고 평가할 것이었으므로, 또 독주 애호가이므로 주저하지 않고 유리병에 든 40도짜리 문배술을 집어 들었다. 200㎖에 약 1만1000원이었다.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에서 건배주로 쓰였다는 점도 나의 궁금증을 자극했다.

문배술은 무색투명했다. 잔에 코를 가져다 댔다. 구수한 단내가 났다. 알코올 기운이 강하게 올라왔다. 처음 맡아본 향이었다. 호기롭게 한잔을 털어넣어 보았다. 굉장히 힘찬 술이었다. 달큰한 맛이 훅 치고 들어왔다.

"아, 이게 문배로구나."

문배를 먹어본 적은 없었지만 어떤 맛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개성이 있었다. 과일맛이 사라지자 입안과 목구멍이 후끈거렸다. 도수가 높지만 넘길 때 걸리는 느낌은 없었다. 배 속까지 뜨거워지지도 않았다.

혹자는 문배술이 고량주와 비슷하다고도 한다. 수수가 들어가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받았을 수 있다. 나는 오히려 위스키가 떠올랐다. 오래 숙성한 위스키만은 못하지만 문배술을 만든 여러 곡물이 희미하게 맛의 층을 구분했다.

문배술은 너무 개성이 뚜렷해 호불호가 갈릴 것 같다. 평소 잡내가 없는 소주나 보드카 등 깔끔한 술을 좋아한다면 문배술이 조금 부담스러울 수 있다. 개인적으로도 쌀 하나만 갖고 만든 증류 소주 쪽이 입에 맞았다. 문배술의 경우 단맛이 지나가면 살짝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그게 별로였다. 하지만 문배술이 제대로 잘 만든 술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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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배술 온더락. 40도의 독주인데다 향까지 진해 선뜻 마시기 부담스럽다면 온더락으로 즐겨볼 만하다. 향과 맛이 딱 좋을 정도로 적당하게 희석된다. /사진=공식 홈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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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수가 높아 온더록으로 즐기는 데도 무리가 없다. 평소 스트레이트 독주를 좋아하지만, 문배술은 오히려 온더록이 낫다. 부담스러운 향이 은은해지니까 한결 마시기 좋았다.

도수와 용량별로 가격이 다르다. 23도, 25도는 더 은은하고 과일향보다는 꽃향이 강조된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홈페이지를 잘 꾸려놓았다. 대형 주류업체를 포함해 이 정도로 홈페이지를 잘 만든 곳은 손에 꼽을 정도다. 병 디자인도 발군이다. 전통주 중에서는 가히 최고라고 할 만하다. 쭉 뻗은 투명한 원통형 유리병에 흰색 라벨을 붙이고, 담담한 필치로 '문배술'이라는 제품명을 새겨넣었다. 앞으로 꽤 잘 팔려나갈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취화선/drunkenhwase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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