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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채인택의 글로벌 줌업] 김정은 핵 도박, 인도·파키스탄처럼 미국의 묵인 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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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국제 제재에도 연쇄 핵실험

열광적인 국내 지지 업고 밀어붙여

미국, 중국 포위 등 국제 전략 고려

2001년 인도와 전략적 동반자 관계

이틀 새 6차례 핵실험 한 파키스탄

미국 ‘테러와 전쟁’ 위해 눈감아

김정은, 국익 따르는 국제 정세 활용

미군 철수 등 한·미 동맹 분열 노려

멈추지 않는 북 핵·미사일 도발 왜



북한의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도대체 어떤 속셈일까. 지난 3일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서 “대륙간탄도로켓(ICBM) 장착용 수소탄 시험”이라며 6차 핵실험을 한 것은 누가 봐도 도박이다. 지난 7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미사일을 두 차례 쏜 지 1개월여 만이다. 6차 핵실험과 관련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지난 11일 새 제재안을 ‘만장일치’로 통과해 처음으로 대북 석유 공급을 제한하고 북한의 섬유 수출을 전면 금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핵실험 12일 만인 어제 아침 일본 상공을 지나는 장거리 미사일을 또 발사했으니 무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러고도 국제사회에서 무사하길 바랄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국제관계를 살펴보면 핵실험을 하고도 일정 시간이 지난 뒤 미국과 잘 지내는 건 물론 심지어 전략적 동반자나 준동맹 관계를 맺고 지원까지 받는 나라가 있다. 바로 인도와 파키스탄이다. 이 두 나라의 핵 개발과 핵실험을 복기해 보면 김정은의 노림수가 보인다.

중앙일보

독립 과정에서 분리된 인도와 파키스탄은 끊임없이 경쟁해 왔다. 핵 개발도 이러한 국가 경쟁 속에서 나타났다. 1998년 5월 10·13일 인도가 핵실험을 하자 파키스탄은 28·30일 맞대응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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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는 1974년 ‘미소 짓는 부처’라는 암호명으로 첫 핵실험을 한 24년 뒤 힌두민족주의정당 BJP의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 총리 시절인 89년 서부 라자스탄주의 포크란 핵실험장에서 ‘샤크티(위력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작전’이란 연속 핵실험을 했다. 5월 11일 세 발을 연속 터뜨린 뒤 13일 두 발을 추가 실험했다. 인도는 언제 어떤 종류의 핵폭탄도 터뜨릴 수 있는 능력을 입증했다. 핵실험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우고 집권 두 달 뒤 이를 이행한 바지파이 총리는 핵보유국을 선언했다. 미국과 일본 등 서방국가가 경제제재에 나섰지만 기꺼이 감수했다. 제재로 경제발전에 필요한 해외 투자가 말랐지만 민영화 정책 등을 통해 경제성장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힌두민족주의자들의 열광적 지지를 얻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바지파이가 서방 경제제재를 감수하면서 정치적 지지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이뤘다”고 지적했다. 김정은이 내세우고 있는 핵·경제 병진정책의 근원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핵실험에 따른 고난의 길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인도가 경제성장을 이룬 데 이어 ‘중국 포위’라는 전략적 가치까지 높이자 미국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미국은 2001년 인도와 전략적 동맹관계 수립에 합의하고 2008년엔 원자력 협력 협정에 서명했다. 제재는 말끔히 사라졌다. 미 의회는 인도 원자력산업에 미 기업의 참여를 허용하는 ‘미국-인도 평화적 원자력법’을 통과시켰다. 핵실험을 한 인도에 미제 핵 연료를 팔 수 있게 됐다. 인도 원자력발전소 건설사업에 대한 노골적인 구애다. 핵실험은 인도에 과학적·군사적 승리는 물론 정치적 승리까지 안겨줬다. 김정은이 눈여겨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김정은은 파키스탄도 염두에 뒀을 것이다. 파키스탄은 인도 핵실험 직후인 그해 5월 28일 서부 발루치스탄의 창가이 지역에 있는 라스코 힐에서 다섯 발의 핵폭탄을 동시에 터뜨렸다. 암호명 ‘창가이1’로 불리는 핵실험이었다. 5월 30일 발루치스탄 하란 사막에서 한 발의 핵폭탄을 추가로 터뜨렸다. 암호명 ‘창가이2’로 불리는 핵실험이었다. 두 차례에 걸쳐 모두 6회의 핵실험을 한 파키스탄은 핵 능력을 사실상 인정받았다. 당시 서방 정보당국은 창가이2가 북한과의 공동실험일 가능성을 의심했지만 확인되진 않았다.

파키스탄도 인도처럼 핵실험 뒤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제재를 받았다. 인도처럼 NPT 회원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재는 험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파키스탄이 냉전 기간 중 미국의 남아시아 동맹국이었다는 점이다. 미국은 당시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에 맞서는 무자히딘(무슬림 전사)의 훈련·투입·보급을 위해 파키스탄의 협력이 필수적이었다.

98년 핵실험으로 인한 미국의 제재는 3년 정도로 그쳤다. 핵실험으로 껄끄러워졌던 미국과의 관계는 2001년 9·11테러가 발생하면서 눈 녹듯 풀렸다. 1989년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철수 이후 파키스탄을 떠났던 미군은 9·11을 계기로 돌아왔다. 미국은 2001년 10월 7일 탈레반 지배의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파키스탄은 군수와 작전의 후방기지 역할을 했다. 탈레반 세력을 공격하는 미 중앙정보국(CIA)의 무인기도 파키스탄 남부 발루치스탄주에서 이륙했다. 파키스탄은 군사적으로 미국의 준동맹으로 간주된다. 미국의 국익은 비핵화와 핵확산금지라는 국제적 원칙보다 우선했다. 김정은의 시선이 고정되는 부분일 것이다.

파키스탄은 북한과 핵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오랫동안 협력해 왔다. 정보당국은 양국이 95년 핵협력협정을 맺고 파키스탄의 핵기술과 북한의 미사일 기술을 서로 맞바꿔 온 것으로 보고 있다. 양국이 핵 개발에서 손잡은 정황은 한둘이 아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위원회의 전문가 패널은 핵과 관련한 유엔 제재 대상인 북한의 장영선과 김영철이 2012년 12월부터 2015년 10월까지 적어도 28회에 걸쳐 파키스탄을 방문했다고 보고했다. 양국 간 핵과학자 교류가 계속되고 이 과정에서 핵기술이 북한으로 흘러 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인도 언론은 파키스탄이 유엔의 대북제재를 어기고 핵 분야로 전용할 수 있는 이중 용도 물품을 북한에 공급하고 있다는 보도도 했다. 이런 핵 협력 과정에서 북한은 파키스탄의 핵기술은 물론 관련 국제 정치 상황도 유심히 살폈을 것이다.

인도·파키스탄 사례를 살펴본 김정은은 중국과 접경한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가치와 각국의 국익에 따라 조변석개하는 국제 정세를 잘만 이용하면 핵 개발로 인한 제재 정도는 언젠가 무너뜨릴 수 있다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앞으로 사실상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고 핵군축을 내세워 핵비보유국인 대한민국을 제쳐놓고 북·미 양자대화를 추구하는 것이 김정은의 노림수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포함한 한·미 동맹 분열을 시도할 가능성이 크다. 김일성 주석이 1968년 2월 8일에 했던 “우리 인민 군대의 장래 임무는 공화국 남반부를 해방하는 데 있다”는 말을 실천할 기회로 여길 것이다. 이는 대한민국에 악몽이자 재앙의 시나리오다. 이를 막기 위해 외교·군사 모두에서 총력전을 펼칠 때다. 국제사회가 국익에 따라 움직인다면 우리도 국민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준비를 해야 한다.

인도-파키스탄 핵 개발 이후 미국 대응
인도

● 인도 1974년 10월 한 차례, 98년 5월 11, 13일 다섯 차례 핵실험

● 미국, 서방과 함께 인도 경제제재

● 미국, 2001년 인도와 전략적 동맹 관계 수립/제재 사라짐

● 미국, 2008년 인도와 원자력 협력 협정에 서명

● 미 의회, ‘미국-인도 평화적 원자력법’ 통과

(인도 원자력산업에 미 기업 참여 허용)

● 미국, 인도와 손잡고 중국 포위 전략

파키스탄

● 파키스탄 98년 5월 28, 30일 다섯 차례 핵실험

● 미국, 파키스탄 경제제재

● 2001년 9·11테러 직후 미군 파키스탄 주둔/제재 사라짐

● 2001년 10월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참공에 파키스탄 기여

● 미 CIA 무인기, 파키스탄 기지에서 발진

● 미국, 테러와의 전쟁에서 파키스탄을 준동맹 대우



[S BOX] 대통령 된 인도 칼람, 가택연금 당한 파키스탄 칸…핵 개발자 엇갈린 운명
인도·파키스탄 핵 개발 책임자의 운명은 엇갈렸다. 인도의 1998년 핵실험인 샤크티 작전에서 수석프로젝트조정관으로서 정치·과학기술 책임을 맡았던 압둘 칼람(1931~2015) 박사는 무슬림인데도 힌두교 중심의 다종교 국가 인도의 국민 영웅이 됐다. 70~90년 우주발사체 개발 과정에서 확보한 기술로 ‘악마 프로젝트’와 ‘용맹 프로젝트’라는 2건의 탄도미사일 개발까지 주도했다. 경공격기 등 무기체계 국산화를 진행하다 핵실험을 맡았다. 2001년 은퇴해 과학 강연을 하다 2002년 집권 우파 힌두민족주의 정당 BJP는 물론 야당인 좌파 국민회의까지 정치권의 폭넓은 지지 속에 간접선거에서 11대 대통령에 당선했다. 의전적·상징적 역할을 하지만 명목상 국가원수다. 2006년 한국을 방문했다.

파키스탄의 98년 핵실험인 창가이 작전은 압둘 카디르 칸(81) 박사가 주관했다. 학위를 받은 네덜란드에서 원심분리기를 이용한 핵물질 생산기술을 몰래 들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확보한 기술로 핵을 개발해 ‘파키스탄 핵의 아버지’로 불린다. 하지만 핵 개발 기술과 관련한 장비, 설계도 등을 북한·리비아·이란 등에 넘겨 ‘핵 확산’에 가담한 혐의를 받고 가택연금을 당했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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