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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오래전‘이날’]9월16일 ‘돌부처’ 이창호 9단은 천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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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이날’]은 1957년부터 2007년까지 매 10년마다의 경향신문의 같은 날 보도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매일 업데이트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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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9월 16일 무서운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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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오늘 신문에는 입단 1년만에 생애 첫 본선 티켓을 딴 소년기사 이창호군 기사가 실렸습니다. 제목은 “입단 1년 만에 ‘무서운 아이’로 소년기사 이창호군”이었습니다. 이군은 이대부속국민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인 ‘어린이 바둑왕’이었습니다. 1986년 7월 입단 10개월만에 최단코스로 2단 승단을 따냈습니다. 승률에서도 한국기원 소속 기사 90명 중 7위를 차지하는 등 무서운 성장속도를 보였습니다.

이군은 또 11세 입단으로 조훈현 9단의 9세 입단에 이은 최연소 입단기록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군은 조 9단의 내제자로 숙식을 같이하며 바둑수업을 받았습니다. 조훈현 9단은 “무척 빠른 속도로 기량이 늘고있어 멀지않은 장래에 한국기단에 돌풍이 예상된다”고 전망했습니다.

이군은 1983년 2월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기원에서 바둑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1년 만에 1급 수준에 이른 바둑천재였죠. 그후 전영선 6단에게 기재를 인정받고 바둑수업을 받았습니다. 이군은 1987년 국기전 3차예선에서 스승과 맞붙어 이기는 놀라운 기력을 과시했습니다.

이군은 훗날 ‘돌부처’ 이창호 9단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 때문에 이 같은 별명이 붙었죠. 이 9단은 최근 한 바둑 잡지가 바둑 국가대표·기자·관계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역대 최고의 기사’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1957년 9월 16일 맥아더 장군 동상 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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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9월 15일 인천항이 내려다보이는 만국공원에 맥아더 장군 동상이 들어섰습니다. 9월 15일은 한국전쟁의 판세를 뒤집은 역사적 사건인 인천상륙작전 개시일이었습니다. 다음날 언론은 동상 제막 소식을 큼지막하게 보도했습니다. 최규남 당시 문교장관은 제막식에서 “우리는 두 분의 맥아더 장군을 가지고 있으니 즉 한분은 미주에 살아계신 그분이요, 다른 한분은 움직이지 않는 동상인데 우리는 영원히 이땅에 머무는 이 맥아더 장군을 존경하고 싶다. 외면으로는 움직이지 않지만 실상은 영원히 우리들의 가슴 속에 움직이고 있는 이분의 정의와 자유의 정신을 우리는 길이 추앙하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50여년이 흐른 뒤 한국 시민사회는 동상 철거를 둘러싼 공방을 벌였습니다. 1992년 윤금이 사건과 2002년 미선·효순이 사건은 주한미군뿐만 아니라 맥아더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는 시발점이 됐습니다. 한국전쟁 시기 한반도에 원자탄을 사용하려 했던, ‘미국의 제국주의적 이익을 관철하려고 했던 점령군의 사령관’이라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문에 맥아더를 미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규정하고 동상을 철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게 일었습니다.

월미도를 마주보고 있는 만국공원은 맥아더 동상이 세워진 후부터 ‘자유공원’으로 불렸습니다. 숱한 철거 논란에도 불구하고 맥아더 동상은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노도현 기자 hyu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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