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세속 막론하고 선의가 부담 되기 일쑤
나 좋으면 남도 좋아하리라는 착각 버려야
혜민 스님 마음치유학교 |
한번은 연세가 지긋하신 한 어머니께서 내게 이런 고충을 토로하셨다. 사위의 건강을 생각하고 염려하는 마음으로 했던 일이 오히려 사위 몸을 더 상하게 하고 관계까지 나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살다 보면 우리의 순수하고 좋은 의도와는 상관없이 생각지도 못한 원망의 화살이 돌아오는 경우가 있다. 특히 부모·자식 간에는 이런 경우가 더욱 빈번하다. 부모 입장에서 좋은 것이라 판단해 내 아이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해주었는데 아이는 오히려 짜증만 내고 싫어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아마도 의도가 좋으면 결과도 좋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착각에서 비롯된 듯하다. 내 의도가 이렇게 선하고 좋은데 어떻게 상대가 싫어할 수 있겠는가? 그런 가능성은 생각조차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 판단으로 좋은 것이 상대에게도 좋으리란 법은 없다. 또한 상대도 독립된 인격체로서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이끌어가고 싶은 자연스러운 욕구가 있다. 그런데 나에게 그것을 원하는지 제대로 묻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결정해서 주는 것은, 아무리 좋은 것을 준다 해도 내 삶의 주도성을 침해받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니 고마운 마음보다는 자칫 결과가 좋지 않으면 원망의 마음만 올라오는 것이다.
[일러스트=김회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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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실수는 일상생활에서 종종 범하게 되는데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하루는 지인들과 모임을 한 후 함께 식사하러 식당에 들어가 각자 먹고 싶은 음식을 시켰다. 나는 같이 나누어 먹을 생각으로 리코타 치즈 샐러드를 추가로 주문했다. 샐러드가 내 앞에 놓여 나는 자연스럽게 집게를 들었다. 내 접시에만 샐러드를 더는 건 좀 염치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이 좋으니 지인들 앞에 놓인 앞접시에 골고루 샐러드를 나누어 주었다. 하지만 나는 이때 그들에게 샐러드를 원하는지 묻는다는 것을 깜박 잊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중 한 분이 리코타 치즈를 싫어하셨다. 내가 물어보지도 않고 마구 나누어 주니 어쩔 수 없이 받아놓기는 했지만 식사를 마칠 때까지 샐러드는 그대로였다. 아마 그분 입장에서는 나누어준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 억지로라도 이 샐러드 접시를 비워야 하나 식사 내내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내가 샐러드를 덜기 전에 물어봤더라면 상대를 불편하게 하지 않았을 텐데, 내가 그 샐러드를 좋아하니 남들도 다 좋아하겠지라는 짧은 생각이 문제였다.
최근에 읽은 소설 『82년생 김지영』에도 이런 유사한 장면들이 나온다. 주인공 김지영은 명절에 시댁에 가서 시어머니와 함께 시댁 식구들이 먹을 여러 음식을 만드느라 많이 애쓴다. 시어머니에게는 일 년에 한두 번 이렇게 식구들이 모였을 때 음식을 손수 장만해 먹이는 것이 즐거움이자 보람이었다. 그래서 힘든 줄도 모르고 사골국을 끓이고 송편을 빚고 각종 전과 나물을 준비한다. 하지만 며느리 김지영이 얼마나 힘들어하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본인에게 이렇게 보람 있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큰 부담으로 다가갈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부모·자식 간이라 해도, 친한 친구 관계라 해도 함부로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이 있다. 친하다는 이유로, 상대를 생각하고 배려한다는 이유로 그 선을 묻지 않고 자주 넘게 되면 그 좋았던 의도가 어느 순간 관계를 엉망으로 만들 수도 있다. 친할수록 지켜야 할 선을 잘 지켜야 좋은 관계가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다. 나 또한 상대를 생각한다는 이유로 그 선을 쉽게 침범한 적은 없는지 반성해 본다.
혜민 스님 마음치유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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