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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노트북을 열며] 어르신 대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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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이후남 문화부 차장


직장생활 초기에는 나이를 내세우며 아버지뻘이라고 자처하는 취재원을 종종 만났다. 젊은 기자의 기를 누르고 싶었는지는 몰라도 내심 코웃음을 쳤다. 형제가 여럿인 데다 막내에 가까운 편이라 우리 아버지 나이가 그 사람들보다 한참 많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스무 살도 안 된 어린 나이에 6·25에 참전한 세대다. 남자들이 가끔 하는 대로 주민등록증을 꺼내 앞자리 숫자로 대결을 벌인다면 우리 쪽이 웬만하면 이길 터였다. 그런 아버지가 지난주 세상을 떠나셨다.

크고 작은 일에 줄곧 함께해주신 일가친척 어른들, 아버지의 평생 친구 등 여러 분이 조문을 오고 입관이나 발인까지 함께했다. 다들 연세도 있고, 집안 내력도 있어 머리가 새하얀 분이 많았다. 그 틈에 잠시 앉아 농담 섞인 인사처럼 “고령자들이 많이 오셔서”하고 말문을 열었다. 한 분이 웃으며 “얘, 고령자란 말은 참 듣기 싫더라”고 했다.

몇 달 전 다른 데서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병원이나 가게에서 많이 쓰는 ‘어머님, 아버님’은 물론이고 ‘어르신’ 소리도 퍽 불쾌하단 얘기였다. 그분 나이를 따져보니 손주손녀도 꽤 컸음직하다. 그런 사람도 ‘어르신’이 싫다는데 열 살쯤 손위인 큰언니가 얼마 전 황당한 경험을 했다. ‘어르신, 여기 앉으세요’하며 자리를 양보하더란다. 고마운 성의는 짐작가지만 듣는 이가 불편하면 헛일이다. 요즘은 공공기관도 각종 행사에 ‘노인’ 대신 ‘어르신’을 쓰곤 한다. 사전을 찾아보면 ‘어르신’은 본래 남의 아버지나 아버지 친구, 그 이상의 어른을 가리킨다. ‘이모’나 ‘고모’가 그랬듯 남용되고 오용되는 중이다.

일본은 매년 9월 중순 ‘경로의 날’이 있다. 몇 해 전 이를 기념해 나온 동영상이 흥미롭다. 나이 지긋한 여성이 전통의상을 입고 길에서 팝핀댄스를 춘다. 비보이 같은 젊은 사람들이 추는 춤이다. 절도 있는 동작과 함께 화면에 나오는 문구가 통렬하다. 우리말로 옮기면 “존경한다고? 얕보지나 마라!”쯤 된다.

과잉된 호칭은 무게중심이 잘못 잡힌 시소 같다. 뒤집히기 쉽다. ‘어르신’이 유행하는 한편에서 노인 비하가 벌어진다. 노인을 비롯해 배려가 좀 더 필요한 사람이 분명 있고, 누구나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배려는 일방적 시혜가 아니다. 나와 당신이 다 같은 사람이란 평등한 인식에서 출발한다.

아버지를 보내 드리고 나서야 ‘아버지’가, 실은 이 나이 되도록 쓰는 ‘아빠’가 나에게 오직 하나뿐인 사람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였다는 걸 깨달았다. 부모 자식 관계는 참으로 복합적인 감정이 응축돼 있다. 오는 손님, 오는 환자마다 그런 관계를 감당할 게 아니라면 아버님, 어머님 소리는 그만뒀으면 한다.

이후남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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