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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 (화)

[분수대] 속인 죄 속은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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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안혜리 라이프스타일 데스크


기간제 교사가 결국 정규직 전환 대상에서 제외됐다. 당장 4만6000여 명의 당사자들은 “정부에 속았다”며 반발하고 있다. 전환을 둘러싼 원칙론이나 현실성 여부에 대한 판단은 저마다 처한 입장과 기준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처음의 의도는 선했을지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 정부가 기간제 교사들을 기만했다는 사실 말이다.

교육 분야 비정규직 개선 방안 발표 후 교육부 관계자가 “기간제 교사를 정규직으로 전환할 수 있는 근거가 없었다”고 털어놓은 데서도 알 수 있듯 현행 임용체계나 관련 법규 등을 감안하면 애초에 전환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뒤늦게 형평성 논란 운운하며 변명할 게 아니라 처음부터 안 된다고 명확하게 선을 그었어야 한다.

그런데도 어찌된 일인지 교육부는 전환 여부를 집중적으로 논의하겠다며 8월 8일 교육 분야 정규직 전환 심의위원회까지 구성하며 헛된 희망을 불어 넣었다. 기간제 교사들의 정규직 전환 촉구 집회 등 갈등을 봉합하기 위한 절차였다고 주장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대통령과 코드 맞추는 시늉을 하느라 어차피 정해진 결론을 감추고 희망고문을 가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기간제 교사들 사이에서 “사기당했다”는 격앙된 표현까지 나오는 건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많은 교육계 인사들이 “안 되는 걸 되는 것처럼 혼란을 부추긴 정부가 어떤 방식으로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속인’ 정부가 아니라 ‘속은’ 기간제 교사들을 오히려 비난한다. 언감생심 무리한 욕심을 품은 게 잘못이라는 주장이다. 정부를 믿고 잠시나마 기대를 품었던 기간제 교사들을 향해 노력 없이 공짜로 챙기려는 사람들이라는 식의 조롱도 넘쳐난다.

마치 “욕심 많고 멍청한 사람만 사기당한다”며 사기꾼이 아니라 사기 피해자에게 손가락질하는 것과 똑같지 않나. 수년간 사기꾼들을 직접 취재했던 심리학자 마리아 코니코바는 “사기당하는 사람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처한 상황이 중요하다”며 “세상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느낄 때 자기 편이 되어줄 것 같은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연다”고 말한다. 누구라도 사기에 걸려들 수 있다는 얘기다. 속인 죄를 물어야지 속은 죄를 물으면 안 되는 이유다.

안혜리 라이프스타일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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