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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스토리텔링 리포트] “저는 17세기 조선 여성, 21세기 병 동맥경화 걸려 숨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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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밥·떡 즐겨 먹던 미라입니다

걸으면 숨차 외출 땐 늘 가마 탔죠

후대 의사들이 제 뇌조직 분석해

동맥경화 유발 유전자 7개 찾았죠

동아시아인 미라로는 처음이래요”

중앙일보

2010년 경북 문경에서 발견된 17세기 조선시대여성 미라의 모습. [사진 플로스원 논문 발췌]


돌이켜 보면 저는 늘 밥을 먹고 나면 소화가 잘 안 되고 피곤했어요. 걸어서 외출하다 보면 얼마 못 가 숨이 가빠 오래 걷지 못했어요. 늘 가마를 타고 다녀야 했죠. 이게 심장병 증상이라는 걸 400년이 지난 요새 알게 됐네요. 제가 심장병 유전자를 이미 갖고 있었다네요. 그때 갑자기 가슴이 아파 쓰러졌는데 이제야 이유를 알게 됐네요.

참,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2010년 경북 문경시 한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발견된 ‘미라’입니다. 사람들은 저를 보고 진성 이씨 집안의 소실(첩)이라고도 하고 결혼하지 못한 노처녀라고도 하더군요. 400년이 지난 후 미라가 돼 주목받을 줄 몰랐습니다. 저의 사망 당시 나이는 35~50세라네요. 임금님의 평균 수명이 46세였으니 제가 좀 일찍 죽은 것 같아요. 관에 석회를 발라 밀봉한 덕분에 미라로 묻혔답니다. 그런데 몇 년 전 웅성거리던 소리가 들리더니 관 뚜껑이 열리더군요. 다시 한번 세상의 빛을 보게 됐죠.

가문의 후손들이 저를 안치하는가 싶었더니 갑자기 낯선 공간으로 가게 됐어요. 2015년 의사라는 사람들이 컴퓨터단층촬영(CT) 기계 속으로 집어넣었어요. 또 저를 부검해 심장 혈관에서 ‘죽상동맥경화증’을 확인했답니다. 혈관에 나쁜 콜레스테롤·중성지방이 쌓여 혈관이 좁아지는 병이라더군요. 요즘 사람들이 많이 걸린다고 하네요. 흡연, 운동 부족, 고칼로리 식단 같은 좋지 않은 생활습관이 원인이랍니다. 방치하면 뇌졸중·심근경색 같은 질환으로 이어진다는군요. 400년 전에 제가 그런 병을 앓았던 거죠.

제가 밥·떡, 밀가루 음식을 참 좋아했어요. 나이 들면서 고기를 즐겨 먹었죠. 동맥경화증의 원인으로 꼽히는 고탄수화물 식품과 칼로리 높은 음식들이죠. 한 연구기관(국립문화재연구소)이 2014년 뼈·머리카락을 분석해 제가 이런 걸 즐겨 먹었다고 발표했답니다.

제가 12일 다시 주목을 받게 됐어요. 동맥경화를 일으키는 유전자가 있다는 거예요. 컴퓨터단층촬영 때와 다른 의사들이 저를 ‘무균실’이란 곳으로 데리고 갔어요. 이들은 방호복에다 장갑·마스크·헤어캡을 착용했더군요. 이들과 저의 DNA가 섞이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라네요. 이들이 뇌 조직을 채취해 갔어요. 표면의 DNA는 오염 가능성이 커 뇌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추출했다는군요.

의사들은 동맥경화증을 일으키는 대표적인 유전자 10개를 골라 제 것과 비교했는데, 놀랍게도 7개가 일치했다네요. 이 중 4개는 세계 공통 유전자이고 3개는 아시아인에게서 많이 보이는 것이라네요.

저를 연구한 의사들은 제가 생활습관 때문에 동맥경화증에 걸렸는지, 유전적 요인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유전자를 분석해 동아시아인 미라에서 동맥경화가 사망 원인으로 확인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또 동맥경화를 현대인의 질병으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동맥경화증을 일으키는 유전적 원인이 17세기 한국인에게서 발견됐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동맥경화 같은 심장질환으로 여성이 35~50세 사이에 사망하는 건 현대에도 일반적인 건 아니라네요. 하지만 저처럼 고탄수화물 식품과 육류를 즐겨 먹고 유전적 요인까지 있으면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이민영 기자 lee.minyoung@joongang.co.kr

※위 기사는 이은주(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신동훈(서울대병원 해부학과) 교수팀이 1600년대 조선시대 여성 미라의 사인을 유전자 분석 기술로 연구한 논문과 이 교수의 설명을 바탕으로 미라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것이다. 논문은 온라인 국제학술지 ‘플로스원’ 최근호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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