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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0 (일)

[김형주의 세계경제 돋보기]한·미 FTA 개정 협상, 우리도 준비운동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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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농구를 무척 좋아하는 후배가 세계 최강으로 꼽히는 미국 선수들의 경기력에 대해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초등학교 시합이건, 고등학교 대항전이건 경기장에 가보면 선수들이 한두 시간 전부터 나와서 준비운동을 하는데, 모두들 너무 열심히 해서 놀랐다고 한다. 가벼운 스트레칭 정도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경기 중에 발생할 만한 극단적인 상황까지 고려해서 상당히 다양하고 강도 높게 진행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면서 미국 농구팀의 경쟁력 중 상당 부분은 철저한 준비운동 덕분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시합 전에 준비운동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적절한 수준의 과부하와 낯선 자극을 통해 근육의 온도와 유연성을 높이고, 경기 중에 맞닥뜨릴 스트레스의 한계를 몸에 각인시킴으로써 경기력을 높이고 부상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모든 선수들이 충분한 준비운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초기에는 차이가 별로 크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고 경기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그 결과는 달라지게 마련이다.

최근 불거진 백악관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폐기 논란 해프닝을 보면 미국 백악관이나 행정부가 본격적인 협상 개시를 앞두고 준비운동을 시작한 듯하다. 물론 미 의회와 통상 실무자들, 기업 로비스트 등이 서둘러 진화에 나선 덕분에 ‘폐기’란 단어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우리 협상단과 미 의회를 향해 자신들은 향후 논의 과정에서 그 정도 극단적인 선택까지도 가능하다는 선언을 했을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미 의회로부터 ‘개정 협상’을 공인받은 셈이 됐다. 미 협상팀은 이 과정에서 한·미 양국 이해당사자들의 손익 관계와 강도를 확인하는 부수적인 성과도 거뒀다.

공식 협상을 시작하기도 전에 강도 높은 준비운동 한 번으로 경기장 분위기를 바꾼 미국 측에 비해 우리는 아직 본격적인 대응에 나서지 않는 모양새다. 어찌 보면 정해진 규정과 절차대로 진행하며 본 경기에 집중하는 모범생 스타일에 가깝다. 백악관과 무역대표부가 서로 역할을 나눠 전 방위에서 공격을 준비하는 미국 측과 달리 통상교섭본부만 홀로 고군분투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차피 개정 협상이 불가피하다면, 이제 우리도 체계적인 준비가 필요하다. 선택 가능한 범위가 넓을수록 유연하고 적극적인 공세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협상에 참여하는 조직뿐 아니라 카드의 종류 역시 다양할수록 좋다. ‘한·미 FTA 종료’ 가능성을 굳이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10년 전 한·미 FTA 체결 협상을 벌일 때도, 한·미 FTA 발효 후에 우려했던 피해가 현실화된다면 언제든지 폐기할 수 있다고 반대 입장을 가진 이들을 설득하지 않았던가?

마찬가지로 한·미 FTA의 개방 범위를 더욱 높일 가능성도 열어둬야 한다. 현재까지 미국 정부가 수용했던 가장 높은 수준의 개방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었다. 우리도 한때 TPP 가입을 긍정적으로 검토했고, 향후 TPP 2.0 등이 추진될 경우 참여 가능성이 적지 않은 만큼 그 정도는 받아들일 만하다.

준비 과정에서 우리 협상단이 고려해야 할 변수로 다음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먼저 기업들에 대한 믿음이다. 지난 5년간 미국시장에서 사업을 성공시켜온 기업들이 비단 한·미 FTA만으로 그만한 성과를 기록했을까?

물론 일부 도움을 받았겠지만 그 비율은 제한적일 것이다. 기업들은 본래 주어진 조건하에서 최적의 해법을 찾는 경제 주체다. 그런 과정을 통해 성장해왔고, 특히 미국처럼 경쟁적인 시장에 진출한 기업들은 더욱 그렇다. 관세율보다 변동 폭이 몇 배 더 큰 환율 충격도 버텨내지 않았던가?

개정 협상 결과가 어떻게 나오더라도 우리 경제와 기업들에 극단적인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은 생각보다 높지 않을 것이다. 한국 기업뿐 아니라 미국 기업이나 소비자들 중에 한·미 FTA 수혜자들이 적지 않다는 점도 기억해둘 만하다.

두 번째로, 한·미 FTA 협정문의 틀이 잘 갖춰졌고, 이를 이행하기 위한 양국의 정책적 의지가 강하다는 점도 긍정적이다. 최근 사드 사태에서 확인했듯이, 아무리 제도가 잘 만들어져 있어도 이를 이행하려는 의지가 부족하면 사상누각이나 다름없다. 반면 다행히 한·미 FTA는 개정이나 종료를 위한 협의마저도 그 틀 내에서 진행될 정도로 ‘제도 이행’에 대한 의지가 강한 편이다.

마지막으로, 한·미 FTA 개정 과정에서 정치적 측면에 대한 고려를 높일 필요가 있다. 현재 미국 백악관과 행정부의 의사결정은 경제적 이해관계보다 정치적 동기가 우선적으로 작용하는 반면 한국 협상단의 판단 기준은 아직까지도 경제적 동기가 더 크게 작용하는 듯하다.

그러나 최근 우리나라를 둘러싼 국제정치 관계가 예사롭지 않은 만큼 우리 역시 정치 외교 변수의 가중치를 높이는 것에 대해 전향적으로 검토해볼 만하다는 뜻이다.

<김형주 |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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