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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0 (일)

[경향시선]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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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구라는 도구가 있어 갈고리처럼 생겼는데, 왜 요구라고 부르는지 물었는데 자꾸

처음부터 있었다고 해. 사전에는 필요한 도구가 要具라는 거지. 이 요구로 무거운

생선궤짝을 찍어 당기면, 경험만 있음 할머니들도 거뜬히 배에서 언 선동오징어

60마리 상자를 옮기지. 이 요구는 길이가 30에서 50센티미터, 1미터 정도로 각각

다른데 그건 일꾼들마다 키와 몸이 다르니, 체형에 맞게 만든다고 해. 허리를

굽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지. 허리는 굽히지 말고 무릎만 굽히라고 그러는군. 그러고

보니 공판장이나 어시장에서 이 요구만큼 적절한 도구가 없더만. 이 요구로 자기 발등

이나 무릎을 한 번은 찍어야만 바다가 사람을 받아준다는군. 한번은 이 요구를 들고

바다에 바닷물을 받으러 갔어. 이 요구로 지난날을 모두 찍어버리려 했지. 그리고

누군가에게 물었어. 나는 누구냐고 나의 괴로움은 무엇이냐고. 처음부터 있었다고 해. - 성윤석(1966~)

경향신문

펜을 들었던 손으로 손에 익지 않은 요구를 사용하는 일, 자신이 쓴 글이 자신을 괴롭히듯 요구가 제 발등을 찍는 일, 그 날카로운 도구로 지난날을 다 찍어버리고 싶은 충동, 그런 경험을 거치고 나서, 어느 날 시적 화자는 요구가 팔에 달린 또 하나의 팔이 되어 있는 걸 발견하지 않았을까? “나는 누구냐고 나의 괴로움은 무엇이냐고” 펜으로 그토록 간절하게 물었던 물음을, 머리와 글이 대답해 주지 않았던 물음을, 팔에 새로 돋은 요구가 대답해 주지 않았을까? 공기처럼 물처럼 “처음부터 있었다고”. 눈과 귀처럼 팔다리처럼 처음부터 몸에 달려 있었다고.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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