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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 (화)

찌릿찌릿 한편의 ‘썸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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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러브라인 추리 프로그램 <하트 시그널>

강력한 마니아층의 사랑을 받는 이유


한겨레21

<하트 시그널>(채널A)은 일반인 출연자들의 ‘썸’ 타는 과정을 보여주고 판정단이 그들의 러브라인을 추리하는 프로그램이다. 채널A <하트 시그널>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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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 시그널>(채널A)은 일반인 출연자들의 짝짓기 과정을 보여주고, 판정단의 추리를 곁들인 관찰예능 프로그램이다. 12부작 금요일 심야 프로그램으로 시청률은 낮지만 강력한 마니아층이 있다.

<하트 시그널>은 진화된 형태의 짝짓기 프로그램이다. 1990년대 <사랑의 스튜디오>(MBC)는 사회자가 출연자들에게 간단한 문답과 게임을 시키고 상대를 고르게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대학생들의 미팅문화를 스튜디오에 옮긴 셈인데, 출연자 2800여 명 중 47쌍이 결혼했다고 알려졌다. 당시만 해도 연애에 대한 사고가 제한적이어서 커플을 맺어주는 방식이 극히 단순했다는 점과 연애가 반드시 결혼으로 이어져야 성공으로 간주한 풍토를 엿볼 수 있다.

2011년부터 3년간 방송된 <짝>(SBS)은 21세기의 달라진 연애 풍속을 반영한다. 소개팅이나 부킹 등 만남이 많아졌고, 노골적인 매칭 시스템을 내세우는 결혼정보회사도 성업 중이며, 연애에 관한 생각이 개방적이어서 혼전 동거도 드물지 않던 시대에, 불과 한두 시간 동안 말 몇 마디로 맺어진 커플이 실제 연인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적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이다. 따라서 훨씬 심화되고 집중된 형식의 짝짓기 프로그램이 요구됐다.

<짝>의 출연자들은 고립된 곳에 일주일간 입소하여, 익명의 상태로 간단한 미션을 수행했다. 짝짓기용 수련회를 리얼리티 쇼로 옮긴 셈인데, 연애라는 발랄한 소재에 걸맞지 않은 진지한 내레이션으로, 마치 <동물의 왕국>을 보는 듯한 느낌을 자아냈다. 즉, 인간의 짝짓기를 인류학적으로 고찰하는 분위기를 풍겼는데 여기에는 프로그램이 지닌 연애 관점이 담겨 있다. 요컨대 연애란 ‘남자 1호’ ‘여자 2호’라는 보편적 개체가 되어 치르는 생물학적 반응이자 생애주기의 특정 시기에 집중해야 할 이벤트라는 의미다.

은근한 탐색전과 밀당

<하트 시그널>은 훨씬 자유롭고 일상적 만남을 추구한다. 출연자들은 한 달 동안 서울 모처에서 동거하지만 입소가 아니다. 각자 자기 일을 하면서 퇴근 후나 휴일 동안 숙소에 머물며 일상을 공유한다. 여러 대의 관찰카메라가 있을 뿐 제작진의 개입이나 규칙은 최소화된다. 출연자는 직접 고백할 수 없으며, 매일 밤 호감을 느낀 상대에게 문자를 보내야 한다. 문자는 제작진이 받아 재전송하므로, 출연자는 누가 문자를 보냈는지 알 수 없다.

남녀 4 대 4 구조에서 이들은 긴밀하게 감정을 교류한다. 은근한 탐색전과 ‘밀당’으로 호감을 보내거나 철회하는 일이 반복된다. 이른바 ‘썸’을 타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중계되는 것이다. ‘썸’은 정식으로 사귀는 건 아니지만 호기심을 가지고 감정을 저울질하는 상태를 말한다. 결혼연령이 늦어지고 결혼하지 않거나 이혼하는 경우가 늘어 이제 연애는 결혼을 앞둔 특정 시기에 몇 차례 거치는 통과의례가 아니다. 연애 횟수는 훨씬 증가했으며, 결혼과 무관하게 관계에 몰입하는 연애와 이별을 반복하거나, 연애라는 진지한 감정으로 진입하지 않은 채 단속적 데이트를 즐기는 ‘썸 문화’가 급격히 늘어났다. 지금 20~30대에게 결혼은 아득하고 연애는 부담스러운 반면 ‘썸’은 지속돼야 할 일상이다.

‘이거 실화냐?’ 묻고 싶은 ‘리얼’

썸이 일상이 된 시대에 매력을 발산해 호감을 얻고 상대 감정을 예민하게 포착하는 능력은 자기계발의 일부가 된다. ‘연애를 글로 배웠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연애술에 관한 지식과 저술이 넘쳐난다. <하트 시그널> 판정단은 연애에 관한 자기계발적 지식을 종합해 실전용으로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민감한 촉을 지녔다는 가수 윤종신, 작사가 김이나, 방송인 신동 등 대중문화인과 정신과 의사로 구성된 판정단은 화면 속 출연자들의 사소한 행동에 담긴 섬세한 의미를 해설한다. 또 출연자의 성격과 심리를 분석해 ‘사랑의 작대기’의 향방을 맞추는 신공을 발휘한다.

사실 액자형 구조는 자기계발적 연애 지식을 전수하는 것 외에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로 남의 연애를 품평하고 가십거리로 소비하는 담론 구조를 제공하는 것이다. 출연자들은 실명, 직업, 나이를 밝힌 상태로 화면에 등장한다. 실제 인물의 실제 연애를 보는 것이니 불편함이 따라온다. 하지만 시청자는 판정단의 해설을 거쳐 출연자를 보기 때문에 민망함과 죄의식이 사라진다. 또한 무엇에 집중하며 봐야 하는지 관전 포인트를 짚어주고, 행간을 읽어야 하는 까다로운 해석과 판단은 판정단이 대신해주니 완벽한 수동 상태로 연애를 관음하며 몰입할 수 있다. 즉, 시청자의 자리는 판정단의 말석쯤에 놓이는데 이들과 함께 남의 연애사를 구경하고 말을 보태가며 가십을 즐기는 완벽한 대리 충족의 쾌감을 얻는 것이다.

‘먹방’ ‘쿡방’의 유행이 혼자 밥 먹는 인구가 늘어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듯, 현실에서 연애가 어려운 사람이 늘어날수록 대리연애를 시뮬레이션으로 즐기는 프로그램도 늘어날 것이다. 실제로 <하트 시그널>의 가장 강력한 마니아층은 군인이며, 사회관계망을 중심으로 프로그램 제목이 알려지면서 일부 동영상의 조회 수가 111만 건을 돌파했고 댓글이 1만 개나 달리는 현상은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한다.

<하트 시그널>은 드라마와 유사한 재미를 준다. 대본이 있다거나 리얼리티가 조작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화면 속 갈등은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의 구조를 갖는다. 견고한 둘의 관계에 누군가 끼어들어 삼각관계가 되었을 때 출연자의 희번덕거리는 눈빛은 여느 주연배우 못지않다. 출연자의 면면도 드라마적이다. 연예인 같은 외모에 직업도 화려하다. 카레이서, 변호사, 뮤지컬 배우, 셰프, 배우 겸 디자이너, 미스코리아, 글로벌 홍보전문가, 대학생 등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구성이 아닌가. 화면에는 이들의 일상이 조금 묻어나지만 큰 걱정은 없다. 최상의 선남선녀의 썸을 감상하는 데 아무 지장 없으며, ‘이거 실화냐?’ 묻고 싶은 ‘리얼’이라는 사실이 몰입감을 더한다.

실제 연애도 청춘시트콤도 불가능한 시대

만약 동일한 구성의 인물들이 한집에 사는 설정으로 ‘남자 넷, 여자 넷’이라는 제목의 시트콤을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젊은이의 현실과 동떨어진 판타지라는 비난이 쇄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 실제 인물이니 짠내 나는 현실을 들어 이들의 ‘드라마’를 비난할 수 없다. ‘엄혹한 현실’ 대 ‘화려한 판타지’의 대립 구도에서, 이제는 ‘리얼’ 요소마저 ‘화려한 판타지’가 끌어가 자신의 것으로 흡수해버린 형국이다. 엄혹한 현실에 놓인 사람들은 이제 ‘리얼’의 화두마저 빼앗긴 셈이니 ‘화려한 가상현실’의 매트릭스에 빠져들 일만 남았다. 어쩌면 <하트 시그널>은 더 이상 실제 연애도 청춘시트콤도 불가능한 시대에 이를 대리할 유일한 형식의 가상체험이자 ‘드라마’인지 모르겠다. <하트 시그널> 출연자들의 본격 연예 활동과 인지도 상승이 회자되고, <내 사람친구의 연애>(Mnet)라는 비슷한 형식의 프로그램이 방영됐다는 소식이 그 예감을 더 강하게 부추긴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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