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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 (화)

[이야기 책세상] 예술가들의 사랑방 - 서촌 ‘보안여관’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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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나라 일본만 가도 오랜 연륜을 자랑하는 료칸(旅館)을 적지 않게 만날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오랜 역사를 간직한 숙박시설을 찾기란 쉽지가 않다. 하지만 서울 시내에도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여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서울의 옛 거리 서촌에는 지난 85년간 자리를 지켜온 여관이 한곳 있다.

가난한 문화예술인의 지붕이 되어주면서 서촌의 유명인사로 통하는 서울 통의동 ‘보안여관’. 모던한 호텔이 즐비한 서울에서 이젠 여관 간판을 찾기가 쉽지도 않고, 또 ‘여관’이라는 단어가 주는 낡고 그늘진 느낌이 퍽 낯설고 당혹스럽기까지 할 수도 있다. 그래도 이곳의 여관이란 간판은 여전히 당당해 보인다.

흑갈색 벽돌로 차곡차곡 쌓아진 2층 건물이 경복궁 옆 서쪽 길가에 자리 잡고 있다. 건물 오른쪽 작은 문 위에는 파란색 글씨로 ‘통의동 보안여관’이라 적힌 간판이 걸려 있다. 이곳이 바로 외롭지만 유명한 ‘보안여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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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문학도 서정주가 묵었고, 시인 이상이 지나다녔고, 가족을 그리워하던 이중섭이 몸을 뉘었던 곳, 통의동 보안여관. ⓒ팜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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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여관의 정확한 건립 시기는 확인되지 않지만, 미당 서정주의 책 <천지유정>에서 “1936년 가을, 함형수와 통의동 보안여관에 기거하면서…”라고 써놓은 기록을 통해 그 긴 세월을 짐작할 뿐이다. 이중섭 역시 이곳에서 머물며 일본에 간 가족을 눈물로 그리워했고, 서정주는 동료 시인들과 함께 문학동인지 <시인부락>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그런 곳이 이제는 서촌의 문화아지트로 탄생하였다. 이곳에 들어서면 입구 왼쪽 벽에 하얀 네온 불빛을 넣은 간판이 있다. 그 옆에 난 작은 미닫이 창문 너머로 주인이 자리한다. 미닫이 너머 주인이 “숙박이요?”라고 물을 법하지만 대신 “몇장이요?”라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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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 들어서면 보안여관 간판 옆으로 미닫이문이 있다. ⓒ팜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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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여관은 지난 2004년 경영난으로 문을 닫고, 깊은 잠에 빠져 있다가 새로운 공간을 지으려고 했다. 그때 인부들이 뜯어낸 천장의 상량판에서 “소화 17년(1942)에 천정을 보수했다”고 적혀 있는 글을 발견했다. 이를 계기로 보수를 마친 뒤에는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이자 전시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실제 투숙객은 받지 않지만 대신에 ‘문화 투숙객’들의 장이 되어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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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으로 올라가면 방마다 깨알 같은 전시물들이 걸려 있다. ⓒ팜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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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나무 계단을 올라가면, 과거 손님이 머물던 방에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공간을 거닐다 보면 과거와 현재, 낡음과 새로움의 만남으로 엉킨 이곳의 시간 때문에, 자신이 지금 어느 시대에 서 있는지 혼동이 일어나는 묘한 체험을 할 수도 있다.

이곳 보안여관에서 몇 걸음 더 나가면 대림미술관과 만나고, 좀 더 산책하고 싶다면 이상의 집까지 들러도 된다. 또 통인시장에서 맛있는 주전부리를 골라 먹으며 즐거운 시간여행을 이어갈 수도 있다.

[MK스타일 김석일 기자 / 도움말・그림 : 엄시연 (‘스케치북 들고 떠나는 시간여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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