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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 (일)

이슈 불법촬영 등 젠더 폭력

[법 밖의 ‘젠더폭력’]결국 칼 빼든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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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해서 더 무서운…‘공포’는 눈앞에 있는데 법은 멀기만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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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여성 ㄱ씨는 이혼 후 같은 회사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연인 사이가 된 남성에게 얼마 전 심한 폭행을 당했다. 온몸에 멍이 들고 치아까지 망가졌다. 이전부터 함께 지내면서 상습적인 폭력과 폭언에 시달려온 터였다. 심한 폭행을 견디다 못한 ㄱ씨는 여성긴급전화를 통해 피해사실을 알렸지만 가해자가 살고 있는 회사 기숙사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긴급피난처에는 7일 동안만 머무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정폭력이나 성폭력 피해자는 국가가 지정한 보호시설로 연계돼 가해자와 격리되지만, ‘데이트폭력’ 피해자가 갈 수 있는 보호시설은 없다. ㄱ씨는 결국 가해자를 피해 회사 기숙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법망 밖에 있는 젠더폭력 공포는 날로 증폭되고 있다. 지난달 27일 경기 남양주에서는 집 안에서 여자친구의 얼굴 등을 주먹으로 마구 폭행한 30대 남성 ㄴ씨가 체포됐다. 피해자는 뇌를 다쳐 의식불명 상태다. 이에 앞서 서울에서는 20대 남성이 만취상태에서 여자친구를 폭행하고 이를 말리는 행인들을 트럭으로 위협했다. 데이트폭력이 살인으로 치닫기도 한다. 지난달 서울 강동구에서는 40대 여성 ㄷ씨가 흉기에 찔린 채 자기 집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범인은 지난해 말 ㄷ씨가 이별을 통보했던 전 남자친구였다. 지난해 4월 서울 송파구에서는 이별 통보를 한 여자친구를 스토킹한 끝에 아파트 주차장으로 쫓아가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2011년부터 2015년까지 연인 사이에 발생한 살인사건은 542건에 달한다. 데이트폭력 살인사건이 사흘에 한 건꼴로 벌어진 셈이다.

정부가 ‘젠더폭력’의 뿌리를 뽑기 위해 칼을 빼들기로 했다. 여성가족부와 국무조정실, 법무부, 경찰청, 방송통신위원회 등은 1일 관계부처 회의를 열고 오는 9월까지 젠더폭력 범부처 종합대책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이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데다 기술 발달로 디지털 성폭력이나 몰래카메라 범죄 같은 신종 성범죄까지 빈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젠더폭력이 극심해진 것처럼 인식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여성들의 경각심이 커지고 수사기관도 이런 종류의 ‘은밀한 폭력’이 범죄행위임을 인지하고 대응하기 시작하면서, 이전에도 존재했으나 가려져 있던 것들이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일 수 있다.

정신과 전문의 하지현 박사는 “과거엔 범죄로 여겨지지 않던 것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젠더폭력 문제가 부상한 측면이 있다”면서 “하지만 자기애와 자기중심주의가 커지면서 공감능력이 전반적으로 떨어지는 사회적 흐름과도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하 박사는 “특히 여성을 동등한 상대로 보지 않는 남성들에게서 ‘거절당하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분노반응이 통제되지 않고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그로 인해 나타나는 폭력은 일반적인 폭력범죄와는 다른 양상을 띤다. 가족이나 부부, 연인처럼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고 범행 장소도 집이나 기숙사같이 사적 공간일 때가 많다. 재발 위험이 높으며, 사건을 공개할 경우 피해자가 오히려 보복을 당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특별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그간 ‘젠더폭력은 특수하고 병적인 남자들이 불특정한 여성에게 저지르는 것’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어서 거리의 조도를 높이거나 CCTV를 늘리는 것 같은 해결책만 나왔는데, ‘사적인 영역’에도 권력관계가 있고 그 안이 위험할 수 있다는 고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이번에 대책을 내놓기로 한 것은 젠더폭력의 사각지대가 많다는 판단에서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데이트폭력 검거 건수는 2014년 6675건에서 2015년 7692건, 지난해 8367건으로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피해는 훨씬 많을 것으로 범죄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지난해 한국여성의전화가 발표한 ‘데이트폭력 피해 실태조사 결과와 과제’를 보면, 설문에 응한 성인 여성 1017명 중 연인에게 신체적 폭력을 당했다고 대답한 사람이 108명이었다. 경찰에 신고했다는 사람은 이 중 30명에 불과했다.

여성들의 공포는 커져가지만 현장에서의 대처나 법적·제도적 해결책은 부족하다. 전문가들은 데이트폭력이 가정폭력과 유사한 부분이 많은데도 피해자를 법적으로 보호할 장치가 매우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데이트폭력 피해자는 가정폭력 피해자와 같은 지원을 받을 수 없다. 가정폭력 사건이라면 경찰이 피해자와 가해자를 격리하는 임시조치를 할 수 있지만 데이트폭력은 형법상 폭행, 상해죄 등으로 처리돼 현장 격리가 어렵다.

용기를 내 상담기관을 찾아가더라도 보복을 피하기 위해 보호시설에 입소할 수 없고, 치료비를 지원받을 수도 없다. 한 지역 1366센터 관계자는 “보호시설과 연계하고 치료비를 지원해줄 수 있는지 상담하는 과정에서 데이트폭력 피해자의 성폭력 피해 사실을 드러내 또 다른 상처를 주거나, 가해자와 사실혼 관계인 것처럼 해서 가정폭력 피해자로 만들기도 한다”고 말했다.

살인까지도 부르는 스토킹 범죄 피해도 역시 보호받을 수 없다. 그런데도 심각한 피해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가해자를 처벌하기조차 어렵다.가해자가 처벌받게 하기가 어렵다는 인식이 퍼지다보니 신고율도 매우 낮다. 지난해 경범죄처벌법상 ‘지속적 괴롭힘’ 처분 건수는 555건에 불과했다.

옛 연인 등의 성관계 사진이나 영상 따위를 온라인에 공개하는 디지털 성범죄는 인터넷이 보급되기 시작한 1990년대부터 발생했지만 최근에야 사회적 이슈가 됐다. 2012년부터 지난해 8월까지 4년8개월간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는 개인 성행위 관련 영상 1만113개에 대한 신고가 접수됐다. 방심위는 심의를 거쳐 영상을 지우거나 해당 사이트에 대한 접속 차단 조치를 취하지만 실효성이 낮다. 이 때문에 피해자들이 높은 비용을 감수하고 동영상 삭제 전문업체를 찾기도 한다. 타인의 신체 일부를 몰래 촬영해 온라인에 공개하는 몰래카메라 범죄는 2011년 1523건에서 지난해 5185건으로 5배 가까이 늘었다.

■젠더(gender)폭력

성별 위계에 기초해 발생하는 폭력으로 여성이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여성 살인이나 가정폭력·성폭력·인신매매·여아낙태 등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으로, 생물학적 성(sex)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정의되는 성을 가리키는 ‘젠더’와 결합시켜 젠더폭력이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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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지원 기자 somni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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