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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0 (일)

[고려인 강제이주 80년] ⑧ 시베리아횡단열차 탑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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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좁은 침대칸서 지내지만 큰 불편 없어"…"씻는 게 가장 큰 문제"

시간대 계속 바뀌어 혼선…"모바일 기기 못 쓰지만 지루한 줄 몰라"

(울란우데<러시아>=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장장 9천288㎞를 달려야 하는 시베리아횡단열차(TSR). 서울∼부산 거리의 20배가 넘고 북극에서 적도에 이르는 먼 거리를 1주일에 걸쳐 가야 하기 때문에 국내에서 흔히 보던 열차와는 다른 점이 많다.

겉보기에는 일반 열차와 다름없지만 객차 안에는 승객들이 일상생활을 하는 데 큰 불편이 없도록 각종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운행 방식에도 차이가 있고 승객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열차에 오른다.

1937년 고려인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끌려가던 길을 따라가는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회상열차' 대원 84명은 24일 오후 7시 10분 블라디보스토크역에서 탑승했다.

27일 오후 모스크바까지 9천288㎞의 절반쯤인 4천107㎞ 지점 이르쿠츠크역에 내려 하루를 묵을 때까지 71시간 53분 동안을 달려야 한다.

◇ 침대·소파 겸용…벽면엔 수납공간

객차는 한 량마다 8개의 방으로 이뤄져 있다. 한 평(3.3㎡)이 조금 넘는 방에 2층으로 4개의 침대가 놓여 있는데, 아래층 침대는 상판을 뒤로 제쳐 소파로도 쓸 수 있고 소파 바닥을 들어 올리면 트렁크를 넣을 수 있는 공간도 나온다. 침대 옆 벽면에도 간단한 물품을 놓을 수 있는 수납공간이 마련돼 있다. 침대 사이에는 탁자가 달려 있고 그 아래 전원 플러그를 꽂는 장치도 설치돼 있다.

복도 양쪽 끝에는 비행기 기내 화장실만 한 크기에 세면대와 변기가 설치된 화장실이 있다. 그 앞에는 뜨거운 물을 받을 수 있는 물통과 간식 판매대가 있다.

회상열차 대원들은 "꼬박 사흘 밤낮을 좁은 공간에 갇혀 지내야 한다는 사실에 걱정을 많이 했다가 막상 타고 보니 그런대로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큰 불편 없이 지내고 있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성남시청의 이재륜(45) 씨는 "솔직히 겁을 좀 먹었는데 나름대로 공간이 짜임새 있게 구성돼 생활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고 말했다.

다만 대원들이 입을 모아 털어놓는 불만은 씻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 화장실이 부족할 뿐 아니라 세면대가 좁고 마개도 없어 바가지로 물을 받아놓고 '고양이 세수'를 하는 게 고작이다. 샤워장이 있긴 하지만 예약을 하고 150루불(약 3천 원)을 내야 이용할 수 있다.

김포시청의 김준환(41) 씨는 "이틀째 일어나 보니 머리카락이 떡이 된 느낌이어서 바가지를 들고 가서 머리를 감았는데 공간이 너무 좁은 데다 열차가 흔들려 생고생을 했다"고 토로했다.

◇ 점심은 식당칸서…아침·저녁은 즉석식품으로

점심은 조를 나눠 열차 식당칸에서 먹는다. 25일에는 연어구이가 나왔고 26일에는 닭가슴살찜이 제공됐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열차 특강도 진행됐다.

2012년 겨울 이르쿠츠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열차를 타고 간 경험이 있다는 김순아(47·여) 씨는 "식당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맛이 괜찮았고, 명사들의 특강 내용도 유익했다"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아침과 저녁은 각자 집에서 준비해오거나 탑승 전 식료품점에서 산 즉석식품 등으로 해결했다. 라면, 즉석밥, 누룽지, 떡국 등 메뉴도 다양했다. 기차가 오래 정차할 때 역 앞에 일시적으로 열리는 노점에서 과일이나 생선 등을 구입하기도 했다.

밤에는 대원들이 방마다 보드카 잔을 기울이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열차에 타기 전까지만 해도 서먹서먹한 사이가 많았는데, 비좁은 칸에서 부대끼며 지내다 보니 금세 친한 사이가 됐다. 10대에서 70대까지 전국에서 각계각층의 인사가 모이다 보니 대화의 주제도 다양했다.

씻는 것 말고도 또 다른 불만은 모바일 네트워크 사정이 매우 좋지 않다는 사실이다. 마을이 있는 지역을 지나거나 역에 정차할 때 무선 신호가 잡히긴 하는데 신호 세기가 약하고 그나마 금세 끊겨 버렸다.

언론사 보도진은 사진과 영상은 고사하고 글 기사를 보내기조차 쉽지 않아 아예 체념했다. 다른 승객들도 전화 통화나 SNS 활동, 포털 사이트 검색 등을 하지 못해 답답해했다. 스마트폰용 유심칩을 사오거나 휴대전화 로밍을 해온 대원은 물론 노트북컴퓨터용 와이파이 기기를 빌려온 대원들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초고속통신망이나 모바일용 네트워크는 역시 대한민국이 최고"라는 찬사가 여기저기서 이어지자 "아무도 살지 않는 이 넓은 지역에 어떻게 기지국을 설치하겠느냐"는 반론도 나왔다.

◇ "문 잠겨 오도가도 못하니 설국열차 생각나"

그러나 의외로 지루하다는 반응은 드물었다. 채민석(37·김포시청) 씨는 "기차 소음이나 코 고는 소리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이룰까 봐 소음 제거 헤드폰을 가져왔는데 기차의 진동이 요람 구실을 해준 덕분인지 낮잠도 잘 자고 있다"면서 "창밖의 푸른 초원과 자작나무 숲을 구경하고 일행들과 대화하느라 심심할 틈이 없어 미리 다운로드해온 미국 드라마 20편 가운데 고작 한 편밖에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인천시에서 온 정연옥(61·여) 씨는 "창밖 풍경이 단조롭긴 하지만 지평선이 보이고 광활한 벌판이 온통 초록빛이어서 마음의 안정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면서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면 넓은 마음으로 살겠다"고 다짐했다.

시베리아횡단열차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가는 동안 시간대는 7차례 바뀐다. 철도 운행 기준 시각이자 객차 전광판에 표시된 모스크바 시간, 현지 시간, 출발지 시간, 한국 시간 등이 뒤섞여 혼선을 빚곤 한다. 탑승 사흘째, 가이드한테서 점심시간을 잘못 통보받아 한 시간 일찍 식당칸에 갔다가 허탕을 치는 해프닝도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역에서 탑승할 때는 객차 연결 구간의 문이 열리지 않아 대원들이 항의하는 소동도 빚었다. 갑자기 비가 쏟아진 데다 무거운 짐까지 들고 있어 불만의 소리가 더욱 높았다. 3일째 점심시간에도 한때 문이 잠겨 오도가도 못하는 일이 빚어졌다.

한화 직원 이일용(41) 씨는 "닫힌 문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사람이 몰려 있는 모습을 보니 영화 '설국열차'의 장면이 생각났다"며 웃음을 지었다.

열차가 중간중간에 정차하면 승객들은 플랫폼에 내려 기지개를 켜고 가볍게 산책을 하는가 하면 주변 경치를 둘러보기도 한다. 이때 열차는 쓰레기를 내려놓고 물과 음식물 등을 새로 싣는다.

◇ "80년 전 강제이주와 비교하면 호사스러운 여행"

또 다른 한화 직원 이다미(27·여) 씨는 "열차 안이 비좁아 답답하고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80년 전 화물칸에 짐짝처럼 실려 끌려간 분들을 떠올리면 우리는 고생은커녕 호사스러운 것 같아 죄송스러운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대원 가운데 최연소자인 서울 을지중학교 1학년 황제웅(13) 군은 "강제이주당할 때 제 또래 소년들도 있었을 텐데 얼마나 무섭고 떨렸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황 군은 "서울시청에 근무하는 어머니와 함께 참여했다"면서 "제 또래 친구들이 없고 대부분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어서 심심할 때도 있지만 역사를 좋아하는 제겐 매우 유익한 시간이고 소중한 체험"이라고 나이답지 않게 의젓하게 말했다.

시베리아횡단열차를 7번째 탔다는 '회상열차' 코디네이터 이재용(41) 한국리더십센터장은 "처음에는 연령층과 직업 등이 다양해 잘 어울리지 못할까 봐 우려했다"면서 "고려인 강제이주 루트를 더듬어본다는 같은 목표를 지닌 분들이어서 그런지 여행하는 태도도 좋고 전체적인 분위기도 화목한 듯하다"고 풀이했다.

27일 오후 이르쿠츠크역에 도착하는 회상열차 탐사단은 이튿날 밤 다시 시베리아횡단열차에 올라 30시간을 달린 뒤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열차를 갈아타고 33시간 만에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에 첫발을 디딘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역에 내릴 예정이다.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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