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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 소리나 몸짓으로 언어를 전달할 때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았다. 그러다 역사시대로 넘어오면서 문자를 사용하게 되고 필사와 기록을 통해 정보의 원형 보존을 하게 됐다. 이후 목판이나 활자를 통한 인쇄 기술의 발달로 정보의 대량 전달이 가능해지고 현재 컴퓨터, IT 정보의 초고속 검색 시대가 도래했다.
경주에서 출토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통일신라시대 751년(경덕왕 10년) 이전에 목판으로 찍은 책이다. 이후 대내ㆍ외적으로 반란과 침입으로 소실 가능성이 높은 목판인쇄에서 활자 인쇄로의 전환을 맞게 됐다.
금속활자 인쇄의 기록은 1234~41년 상정예문,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등이 있지만 실물은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1377년(고려 우왕 3년) 청주 흥덕사에서 찍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약칭 직지)'은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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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 주한 프랑스 대리공사인 꼴랭드 쁠랑시가 1891년까지 근무하던 중 궁중 무희였던 이심과 결혼(고종이 하사)하고 프랑스로 돌아갔지만 부인의 향수병으로 1896년 주한공사겸 총영사로 다시 부임하게 됐는데 그 당시에 쁠랑시가 직지를 수집한 것으로 알려졌다.
쁠랑시는 직지를 수집하고 직지 표지 앞에 '주조된 글자로 인쇄된 책으로 알려진 것 중에 가장 오래된 한국 책. 연대=1377' 이라고 적어놓았다.
그리고 처음 직지가 해외에서 공개된 것은 프랑스 파리 만국박람회 한국관에서 직지를 전시하게 되면서부터다. 이후 쁠랑시가 가지고 있었던 대부분의 고서와 한국 물건들이 경매에 부쳐지며 그때 직지를 경매로 소장하고 있던 베버의 유언에 따라 지금의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되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박병선 박사가 1972년 유네스코 세계 도서의 해 기념 책 특별전에서 직지를 포함한 한국자료 3종을 전시하게 됐으며 직지의 흑백사진을 한국에 제공해 1973년 직지 영인본이 탄생하게 됐다.
이후 직지를 간행한 청주 흥덕사지가 발굴되고 1992년 청주고인쇄박물관도 개관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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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활자 인쇄의 세계사적 의미를 살펴보면 중국이 인쇄의 원리를 발견했다면 한국은 활자인쇄의 실용화에 성공, 독일은 보편화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황정하 청주고인쇄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금속활자의 발명국 한국은 언어, 문자, 인쇄, 전자미디어까지 이러는 문자와 IT강국으로 성장했다"며 "그 옛날 고려시대의 발명 DNA가 현재의 미디어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한 것"이라고 자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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