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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위안부 합의로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에서 올 초 이사 2명이 잇따라 사임한 데 이어 김태현 이사장까지 임기를 1년여 남겨두고 사의를 표명한 것으로 23일 확인됐다. 여성가족부가 재단 사업을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밝힌 상황에서 이사들에 이어 이사장까지 그만두면서 재단이 사실상 해체 수순에 돌입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 7월 피해자 지원단체들과 시민사회의 거센 반발 속에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은 지난 1년간의 활동을 하는 동안 ‘치유금’을 원치 않는 피해자들에게 현금 지급을 종용했다는 주장이 나오는 등 숱한 논란을 일으켰다.
■반발 속 출범.. 이사진 구성·재원부터 논란
화해·치유재단은 2015년 12월28일 한·일 위안부 합의 후 7개월만인 지난해 7월28일 공식 출범했다. 재단 준비위원장을 맡았던 김태현 성신여대 명예교수가 이사장이 됐고 일본 전문가와 법조계 인사 등 이사진 10명이 구성됐다. 정작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애쓴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나 위안부 전문가는 빠져 논란을 빚었다. 재단이 여가부 산하에 설치됐고, 이사진 중 외교부와 여가부 담당국장이 각각 1명씩 당연직 이사로 포함됐고 정부에서 상근직원을 파견했는데도 ‘민간재단’ 형태를 고수해 국회 감시를 피하려는 꼼수라는 비판도 나왔다. ▶[사설]화해도 치유도 없는 위안부 재단 졸속 출범
일본은 8월31일 한·일 합의에서 출연을 약속한 10억엔을 화해·치유재단에 송금했다. 재단은 10억엔 중 8억엔으로 생존 피해자들에게 1억원, 사망자 유족들에게 2000만원 규모의 현금을 주고 남은 2억엔은 기념사업 등에 쓰겠다는 방침을 정했다. 사실상 일본 정부가 출연한 10억엔을 한국 정부가 받아서 나눠주는 꼴이 된 것이다. 10억엔의 성격도 명확히 정리되지 않았다. 일본은 이 돈의 성격을 두고 수차례 “배상금이 아니다”라고 못박았다.
10억엔의 법적 성격이 배상금인지 여부는 일본이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하는지와 직결되는 문제다. 일본이 배상금이 아니라고 명확하게 밝혔는데도 한국은 이 돈의 성격을 공개적으로 명확히 규정하지 못했고, 일본의 주장에 반박하지도 않았다. 한·일 합의가 일방적으로 일본에 유리하게 돼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나눠주기 ‘심부름’하는 한국 정부…일본 ‘위안부 합의 10억엔’ 화해치유재단에 송금
지난해까지만 해도 정부는 화해·치유재단에 인적,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지난해 정부는 민간단체의 일본군 위안부 기념사업에 지원하던 예산 1억5000만원 전액을 재단 운영자금으로 내놨다. 일본 측 출연금 10억엔을 모두 피해자 지원과 기념사업에 쓸 수 있도록 재단 운영비를 한국 정부가 부담해달라는 재단 측 요구에 따른 것이다. 민간단체 기념사업 지원 항목은 2014년 처음으로 여가부 예산에 포함됐다. 2014년과 2015년에는 공모 절차를 거쳐 사업수행기관을 선정했지만, 여가부는 지난해 공모 절차도 거치지 않고 이 예산을 재단에 몰아줬다.
▶10억엔 배상금? …얼버무린 윤병세
결국 국회가 관련 예산을 전액 삭감하는 등 제동을 걸었다. 그러자 화해·치유재단은 10억엔 중 5억3500만원을 올해 운영비로 쓰기로 했다. 재단은 “일본 출연금은 의미를 감안할 때 온전히 피해자분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나 정부 예산이 삭감된 것 등을 고려해 최소한의 행정비용을 일본 출연금에서 사용한다”고 적시했다. 재단 자체의 존속을 위해서까지 일본 측 출연금이 투입된 셈이다.
▶[단독]일본이 출연한 107억중 5억원, 화해치유재단 운영비로
■합의 정당성 보여주려 피해자에 ‘수령 종용’
지난 2월 SBS <그것이 알고싶다>는 김 이사장과 위안부 피해자의 대화를 공개했다. 김 이사장은 “살아계실 때 돈을 받고 사과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게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등, 합의의 내용을 설명하기보다 시종일관 돈을 받으라고 설득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종적, 불가역적 합의’라고 합의문에 명시돼 있는데도 김 이사장은 “아베 신조 정권이 오래 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사과를 할 수 있도록 일단 시작을 해야 계속되는 것”이라며 합의 내용을 왜곡하기도 했다.
화해·치유재단은 위안부 합의가 체결된 2015년 12월28일 기준으로 생존한 46명의 피해자들에게 1억원의 ‘치유금’을 전달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재단 측은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여러 차례 “시설에서 생활하시는 분 일부를 제외하고 피해자들 대부분이 재단 사업과 치유금 지급에 동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설이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나 나눔의집 등 시민사회단체가 운영하는 위안부 피해자 거주시설을 의미한다. 재단이 피해자들을 시민사회와 분열시키려 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됐다. 위안부 합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피해자들 대다수가 일본 거출금을 받아갔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기도 했다.
▶“정부, 발족식 나와 돈 받아가시라고 개별 접촉”
하지만 재단이 합의에 대해 설명 않고 돈을 받아가라고 종용하거나, 피해자 대부분이 고령으로 의사소통이 어려운 점을 이용해 가족들을 회유했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재단 출범식 전부터 외교부와 여가부가 피해자들과 개별 접촉하며 ‘점심을 대접해준다’면서 출범식 참여를 독려했다는 말이 나왔다.
피해자가 돈 받기를 거부했는데도 재단이 일방적으로 통장에 입금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지난 1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와 함께하는 통영거제시민모임’은 기자회견을 통해 “통영에 사는 김복득 할머니가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1억원을 지급받았다”고 주장했다. 김 할머니는 통장을 본 적도 없고 돈을 받은 사실도 몰랐다고 말했다. 이런 행태가 최근까지 계속됐다는 증언도 있다. 윤미향 정대협 대표는 지난달 페이스북에 “재단 측이 치유금 수령을 거부한 할머니 가족에게 전화를 해 6월 말까지 안 받으면 못 받는다고 말했다”는 글을 올렸다. 재단 측은 모든 의혹에 대해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했다.
▶화해·치유재단 ‘위로금’ 일방 지급…위안부 피해 할머니 “돌려주겠다”
국회 여성가족위원회는 지난해부터 화해·치유재단에 위안부 피해자와의 면담 녹취록을 공개하라고 주문했지만 재단 측은 피해자들의 사생활 보호 등을 이유로 응하지 않고 있다.
■결국 해체 수순 돌입하나.. 이미 이사진 3명 공석
23일 여가부에 따르면 김 이사장은 지난 19일 이사회에서 이사장직을 그만두겠다는 뜻을 밝혔다. 재단은 조만간 김 이사장을 사직 처리할 방침이다. 재단 이사 가운데 김교식 아시아신탁 회장, 이은경 법무법인 산지 대표변호사는 올 초에 이미 사임했다. 김 이사장이 물러나면 11명이던 재단 이사회에는 8명만 남는다. 김 이사장은 위안부 합의에 대한 비판 여론에 상당한 부담을 느껴온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해 재단 출범식 직후에는 위안부 합의에 반대하는 남성으로부터 캡사이신 공격을 당한 일도 있다.이사 3인이 공석이어도 의결정족수는 채울 수 있어, 당장 재단 업무에 차질이 생기지는 않는다. 재단은 사망한 피해자 유가족에게 2000만원을 주는 일을 지금도 하고 있다. 하지만 정현백 여가부 장관이 이미 “재단 사업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데 이어 이사들과 이사장이 줄줄이 사임하게 되면 새로 이사장을 선임하거나 이사를 보충하는 대신 해산 수순을 밟을 가능성도 있다. 재단 관계자는 “새 이사장 선임 여부 등은 아직 결정된 바 없다”고 말했다.
▶정현백 여가부 장관 “화해치유재단 사업 세세하게 재검토”
재단이 공고한 위안부 피해자 현금지급 신청은 지난달 30일 마감됐다. 재단은 지난 19일 이사회에서 사망자 12명에 대한 현금 지급을 의결했을 뿐 접수 연장 등 추가 공지는 하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합의일 기준 생존자 47명 가운데 36명, 사망자 199명 중 65명만 현금지급을 신청했다.
재단 정관에 따르면 이사회가 재적이사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해 여가부 장관의 승인을 받으면 재단을 해산할 수 있다. 여가부 장관은 해산을 결정할 때 외교부 장관과 협의해야 한다.
<남지원 기자 somni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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