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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6 (토)

[밀착취재] 마지막 사시(司試)… 개룡남·개룡녀 산실 '역사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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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까지 나흘간 2차 시험… 배수진 친 수험생들 / 조선변호사시험 시작 1964년 도입/ 2007년 로스쿨 도입으로 폐지수순/ 올 합격자 단 50명… 경쟁률 4대1/ 사시 폐지 앞두고 갈등 불씨 여전/‘존치 모임’ 대규모 단체행동 기획

세계일보

지난 14일 오후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라운지. “형~”이라 부르며 터덜터덜 걸어 나오는 최모(28)씨의 발걸음에는 유난히 힘이 없었다. “오랜만이에요”라며 첫 인사를 건넨 그에게 “딱 일주일 남았네?”라고 묻자 “그러게요. 제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결전의 날’이 이제 일주일이라니. 심적 부담이 상당하네요. 사법고시라는 기회가 이제 더는 없는 거니까...그야말로 ‘배수진’의 심정이랄까”라며 힘없이 웃었다.

사법시험은 조선변호사시험(1947~49)과 고등고시 사법과(1950~63년)를 거쳐 1964년부터 지금의 시스템을 갖추게 됐다. 흔히 ‘사법고시’라 불리지만, 정확한 명칭은 사법시험이다. 과거에 고등고시의 한 분과였기에 사법고시라고 불렸던 것. 과거 사법시험은 합격하면 곧바로 판검사, 변호사 등 이른바 ‘사짜’ 직업을 갖게 됐기에 ‘개룡남, 개룡녀’(개천에서 용 난 남녀)의 산실이었다. 그러나 2007년 로스쿨 도입이 확정되면서 단계적 폐지수순을 밟게 됐다. 2009년까지 합격자 정원이 1000명에 달했으나 이후 순차적으로 줄어들었다. 올해 합격자는 단 50명. 1차 시험은 지난해가 마지막이었고, 21일부터 24일까지 치러는 올해 2차 시험을 끝으로 사법시험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올해 2차 시험 응시자는 196명. 경쟁률은 3.92대1. 중고교 시절 전교 1등을 밥 먹듯 했을 최씨에게 “4명 중 1명에만 들면 되겠네“라고 말하자 최씨는 “그렇게 생각하면 편할 것 같은데...심적 압박 때문에 그런지 쉽지 않네요”라며 “동기들은 어느덧 취업해서 고시촌에서 직장 근처로 좋은 집으로 이사가는데, 저는 아직 학교와 고시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조바심이 들기도 해요”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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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의 최근 일과는 단순하다. 눈 뜨고 있는 거의 대부분 시간은 공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전 6시에 일어나 중앙도서관에가는 최씨는 도서관이 문닫는 11시까지 법전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이후에도 고시촌 자취방에서 오전 2~3시까지 공부한 뒤 잠에 든다. 최씨는 “어제부터 과목당 하루씩 정리하고 있어요. 과목이 7개니 하루씩 보면 딱 그날이네요”라면서 “탈나면 안 되니까 식사도 자극적인 음식은 피하고, 주변과의 연락도 거의 안하면서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있어요. 부모님과 통화 안 한지도 일주일이 넘었네요. 제가 부담가질까봐 전화도 잘 안 하세요”라고 답했다.

최씨는 군 제대 후 2013년부터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사시 폐지를 알고 시작한 것이다. 법조인이 되기 위해선 로스쿨로 진학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시를 택했다. 최씨는 “로스쿨은 학점이나 영어 성적 등 소위 스펙이 좋아야 한다. 게다가 등록금도 부담이 크다. 사법시험은 오로지 공부양만으로, 내 노력만으로 승부할 수 있어 좋았다. 그래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작했다”면서 “만약 이번에 떨어지면 로스쿨 진학보다는 취업을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어 “주변 고시생들을 보면 사시에 몰두하느라 로스쿨 진학을 위한 스펙이 턱없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가령 사법시험은 토익 700만 넘으면 응시가 가능한 반면 로스쿨은 900이 기본이라더라. 반드시 학부를 졸업해야 로스쿨에 갈 수 있는 것도 고졸자들에 대한 차별이라고 생각한다. 로스쿨에 상관없이 사시는 사시대로 남겨뒀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아직도 든다”고 말했다.

신림동 녹두거리 고시촌에서 만난 김모(32)씨도 “벌써 사법시험을 준비한 지 7년째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사즉생, 생즉사’의 심정으로 공부하고 있다”면서도 “로스쿨은 학부 졸업 뒤 곧바로 진학하는 이들을 우대한다는 얘기가 많아서 생각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장학금 제도가 잘 마련되어 있다고는 해도 한 학기 1000만원이 넘는 등록금을 또 다시 부모님께 손 벌리기는 너무 죄송하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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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회 사법시험 1차 시험이 열린 2016년 2월 27일 서울 중구 한양공업고등학교에 차려진 고사장에서 응시자들이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연합 자료사진


사법시험에 합격해 법조계에 종사하고 있는 선배들도 사시 폐지를 안타까운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2015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뒤 로펌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박모(30)씨는 “2년 동안 사는 게 정신없이 사느라 잊고 지냈지만, 이제 곧 사시가 없어진다는 얘길 들으니 먹먹하다. 연수원 동기들과 가끔 모여 힘들었던 지난날을 얘기할 때면 아직도 눈물이 나기도 한다. 이제 그런 경험을 할 후배들이 없다고 생각하니 스스로 유물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들기도 한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번 2차 시험을 보는 이들은 마지막 기회라도 있다. 그러나 그 자격조차 갖추지 못한 이들은 이대로 사법시험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절박함이 더 크다. 이에 ‘사법시험 존치를 위한 고시생 모임’도 21일 2차 시험 첫날 사시 존치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펼칠 예정이다. 이종배 대표는 “2차 시험이 끝난 뒤인 7월초에는 그들도 합류해 사시뿐만 아니라 나머지 고시에 대한 축소 움직임에 반대하는 대규모 단체 행동을 기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남정훈 기자 ch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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