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 실용주의 노선 모색.. 외교정책도 명칭 안붙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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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이 '동북아 균형자론'을 채택한 이래 이명박.박근혜정부의 균형외교에 이르기까지 한국 외교의 중심에 서서 많은 논란에 휩싸였던 균형론이 12년 만에 정부의 외교담론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문재인정부의 이 같은 구상은 남남갈등 등을 촉발하는 모호한 균형자론 대신 '진보적 실용주의' 시각에서 한반도 문제 주도권 확보를 위한 제3의 길을 모색하겠다는 취지로 풀이된다.
■文정부, 핵심 외교라인 "균형자론은 실패한 용어"
서훈 국가정보원장 후보자는 최근 본지 기자와 만나 "외교정책기조상 '균형자론'이란 용어를 쓰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서 후보자는 "균형이란 말은 각자가 다른 각도에서 보면 논란의 소지가 있어 참여정부 때도 많은 비판에 휩싸인 바 있다"고 말했다. 서 후보자는 "한반도 문제에 대한 주도권을 쥐고 가겠다는 외교정책의 기조 자체는 명확히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24일 문재인정부 외교안보팀에 합류한 청와대 국가안보실 김기정 2차장(옛 외교안보수석)도 대선 직전인 지난달 "균형외교라는 말은 과거 2012년 대선 때도 썼고, 박근혜정부에서도 썼지만 완전히 실패한 용어이기 때문에 쓰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차장은 "한반도를 둘러싼 미.중 협착구도가 심화돼가는 상황인 만큼 우리의 외교적 공간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면서 "'미국이냐, 중국이냐' 양자택일식으로 우리 스스로를 곤경에 빠뜨리는 외교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 차장은 "소위 '유연한 외교', 소위 '돌고래 외교'를 지향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균형외교 변천과 잔혹사
균형자론은 지난 2005년께 이종석 사무차장이 이끌던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작품이다. 미.중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균형점을 잡아 한반도 문제에 관한 제 목소리를 내겠다는 발상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정권별로 '균형점'이 달랐고, 정권의 외교안보팀 내에서도 늘 논쟁의 대상이었다.
참여정부의 자주외교 역시 마찬가지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반미면 어떠냐"에서 시작했지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 결정이나 이라크 파병 등 결과적으로는 역대 어느 정권보다도 미국과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이로 인해 '왼쪽 깜빡이 켜고 우회전 했다'는 비판이 따라다녔다.
이명박정부 때는 대미 편중외교로 점철됐고, 박근혜정부는 균형점을 두 번에 걸쳐 중국과 미국을 넘나들었다. 그로 인해 명분도 실리도 모두 바닥을 찍었다. 임기 초반 중국이 북한문제의 해결사가 될 것이라고 믿었던 생각은 패착이 됐고, 임기 중반 워싱턴의 '반감'을 만회하려던 나머지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위안부 협상이란 무리수를 두기에 이른다.
■비둘기파 제3의 길 모색하나
외교라인의 핵심축인 국가정보원 후보자와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의 이 같은 구상은 문재인정부의 외교정책이 불필요한 이념 논쟁을 배제하고 실용주의적 진보주의 관점에서 국익 중심의 외교로 제3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현재로선 '대화'가 시작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국가안보실 이상철 1차장은 6자회담 대표단 등 참여로 군 내에서 대북협상 경험이 가장 많은 인물로 손꼽힌다. 김기정 2차장 역시 대화파에 가깝다. 서훈 국정원장 후보자는 1, 2차 남북 정상회담의 설계자로 불린다. 청와대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나 김기정 차장, 강경화 외교부 장관 후보자 모두 정통의 북미라인이 아니라는 점도 주목할 점이다.
이런 인적구성은 과거 문 대통령이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NSC에서 동맹파와 자주파 등 외교안보팀 내에서의 무익한 이념 논쟁으로 인한 갈등과 비효율을 목도했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다만, 대화론자 일색인 외교안보라인 구성으로 인해 북한의 도발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미국과의 대북 공조에 혼선이 야기될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아울러 '신뢰외교' '동북아평화협력구상' '한반도신뢰프로세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신아시아주의' 'MB독트린' 등 전임 정부의 현란한 외교정책 작명 작업도 이번 정부에선 관심에서 멀어질 것으로 보인다.
서훈 후보자는 "정책 명칭을 만들지 않을 것"이라며 "명칭의 테두리에 갇히지 않고 실제 정책 효과에 집중하겠다"고 강조했다. 작명으로 인한 불필요한 논쟁, 논리의 제약 등 언어의 함정에 빠지지 않겠다는 것이다. 용어 설정 자체가 보수 측의 공격포인트가 될 수 있다. 논쟁의 최소화로 개혁의 동력을 잃지 않겠다는 게 문 대통령과 참모진의 생각인 것으로 읽힌다.
ehcho@fnnews.com 조은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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