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아이티 2대 도시인 카프아이시앵에서 차로 40분 떨어진 아이티 북부 카라콜 지역까지 버스로 이동하면서 갖가지 상념에 젖었다. 2010년 1월 12일, 진도 7.0의 대지진이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 주변 지역을 강타하자 수도는 거의 폐허로 변했고, 30만 명의 사망자와 18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아이티 인구(1000만 명)의 무려 3%가 대지진으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정상적인 국가 운영이 어려운 이 나라에 서방 세계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미국 정부와 미주개발은행(IDB)이 ‘아이티 재건 프로젝트’에 시동을 걸면서 공단을 조성하고 발전소를 짓기로 했다. 그리고 현지에 투자를 하고 일자리를 창출할 외국기업을 찾았다. 아이티가 빈곤에서 탈출할 수 있는 수단은 봉제공장처럼 일자리를 다수 창출할 수 있는 제조공장 건설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이 프로젝트에 한국의 의류수출기업인 세아상역이 전격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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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기 회장 “3년 내 아이티에 12공장까지 건립”
당시 클린턴 미 국무장관의 권유도 있었지만 1997년 아이티를 첫 방문하면서 이곳과 인연을 맺은 김웅기 세아상역 회장은 ‘아이티가 내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카라콜 산업단지에 첨단 봉제공장(S&H글로벌)을 설립하기로 결심했다. 미국 수출분에 대해 2020년까지 무관세 혜택을 받는 조건(현재 2025년까지 연장)을 감안하더라도 전기, 도로, 항만 등 제조여건이 거의 전무한 아이티에 투자하는 건 일종의 모험이었다. 2012년 10월 문을 연 S&H글로벌은 1억4000만달러(2016년 기준)의 수출 실적을 거둔 아이티 최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생산된 옷은 미국으로 100% 수출되며 월마트, 타깃, 갭, 콜스 등 미국 대형 유통·의류업체에 OEM(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 방식으로 공급된다. 김웅기 회장은 “세아상역을 5공장까지 완공해 9000명이 일하고 있고, 향후 3년 내로 12공장까지 건립해 2만 명의 아이티인들을 고용한 대규모 섬유 수출기업으로 키울 계획”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 경우 세아상역의 아이티 누적 투자액은 1억달러를 상회하고 대미 수출액은 4억4000만달러에 달할 전망이다. 아이티 공장은 1인당 180~200달러 수준으로 인건비가 저렴하지만 베트남, 과테말라 등 세아상역의 다른 해외법인에 비해 생산성이 떨어져 꾸준히 직원 트레이닝을 병행하고 있다.
세아상역 의료봉사활동 의료진들이 아이티 지역주민들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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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초등학교 지어 교육·급식 무상 제공
세아상역의 스토리가 여기서 끝났다면 못내 아쉬웠을 것이다. 세아상역은 최빈국 아이티에 희망을 줄 수 있는 더 큰 수단을 교육에서 찾았다. 아이티는 2010년 대지진으로 학교의 23% 이상이 붕괴된 상태였다. 세아상역은 아이티 카라콜 산업단지 인근에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지어 2013년부터 최고 수준의 교육과 급식을 무상으로 제공했다. 그러자 세아상역을 바라보는 아이티인들의 시선이 확 달라졌다.
세아학교는 세아상역 생산공장에 근무하는 현지 근로자 자녀들만을 위한 학교가 아니다. 지역 어린이들은 누구나 지원할 수 있는 개방형이다. 이 어린이들이 당장 세아상역의 매출과 채용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는 않지만 지역 커뮤니티에 기여해 회사의 신뢰를 지속적으로 쌓아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김 회장은 판단했다. 한국이 6·25 전쟁 이후 가난에 찌들었을 때 서방국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처럼 최빈국 아이티를 한국기업이 돕는 건 어찌 보면 숙명이라는 생각도 했다.
아이티는 초등학교 진학률이 50%, 대학 진학률이 1%에 불과할 정도로 교육여건이 열악하다. 아이티에는 변변한 산업이 없어 생계를 꾸려갈 직업이라는 게 별로 없다. 농사를 짓거나 무직 상태로 배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빈곤의 악순환을 끊고 국가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방안은 국가의 미래인 아이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다. 세아상역은 초등학교 건립과 함께 학교의 영구적인 운영을 위해 아이티 현지 재단인 ‘세아재단’도 설립했다.
아이티 북부 카라콜 산업단지에 위치한 세아상역 봉제공장에서 아이티 봉제 현지 직원들이 작업하는 모습. 생산된 옷은 100% 미국으로 수출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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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아중 개교식에 아이티 대통령까지 참석
올해 3월 세아중학교 개교를 알리는 행사를 진행했다. 기존 초등학교 졸업생들이 상급학교에서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도록 별도의 중학교를 세운 것이다. 하정수 세아상역 대표는 “모두가 어렵다고 생각했던 한국에서 한강의 기적이 일어났듯이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아이티에도 세아와 함께 희망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학교 인근 주택가는 한국의 1950~1960년대를 연상케 하는 허름한 집과 쓰레기 더미로 덮여 참담한 모습이었지만 첨단 교육시설과 식물원을 연상케 하는 교정을 갖춘 세아중학교 만큼은 완전 딴 세상이었다. 미국의 웬만한 공립학교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깔끔한 현대식 건물과 기자재가 눈길을 끌었다.
2021년이면 초·중·고등과정(1~12학년)을 모두 갖춘 아이티 최고 수준의 종합학교(700명 규모)가 완성돼 아이티 사회공헌활동의 새 지평을 열게 된다. 일개 중학교 개교식이지만 아이티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의 비서실장을 지낸 셰릴 밀스, 미주개발은행(IDB), 한국국제협력단(KOICA) 고위 관계자들이 대거 참석할 만큼 지난 3월 행사가 최빈국 아이티에 주는 의미는 남달랐다. 세아학교 학생들은 중학교 개교식 행사에서 우렁찬 목소리로 한국의 가곡 ‘고향의 봄’을 합창해 300여 명의 현지 참석자들을 감동시켰다.
조브넬 모이즈 아이티 대통령은 “교육은 아이티 미래에 매우 중대한 요소”라며 “세아상역의 헌신적인 투자 덕분에 아이티 북부의 교육여건이 한층 개선되고 있다. 정부는 학교 발전의 장애물을 없애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 뉴욕시 교육부 청장을 지냈던 진 머빌 세아학교 교장은 “세아학교는 아이티의 신선한 공기와 같다”며 “아이티의 미래 지도자를 육성하려는 학교 목표에 지역 학부모들이 전폭적인 존경심을 표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세아학교의 모든 학생들은 아이티 모국어인 크레올어뿐 아니라 영어와 스페인어, 프랑스어도 함께 배우고 있다.
김 회장은 “양질의 교육이 중요하며, 교육이야말로 아이티 국민에게 진정 희망을 주는 것이다. 지난 30년간 세계 곳곳에서 진행한 해외사업 중 가장 보람찬 투자를 묻는다면 아이티 공장 건설과 세아학교 건립”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또 “세아학교 졸업자 중 일부를 장학생으로 선발, 미국과 한국 유수의 대학에 보내기 위해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프란지 알렉시스 아이티 초등교육 행정관은 “항상 아이티 교육의 질에 대해 얘기를 나눴지만 세아학교를 둘러보고 나니 교육의 질이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세아학교는 학생들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의 교육센터와 커뮤니티센터 역할도 맡고 있다. 세아학교 시설보다 더 나은 현대식 건물을 주변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의료봉사활동도 병행… 미 간호대학과 글로벌 협력
세아상역은 학교 건립과 함께 각종 의료봉사 활동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대지진이라는 자연재해 이후 콜레라 등 수인성 전염병으로 고생하던 아이티에 대규모 위생키트를 지원한 것도 세아상역이다. 김 회장은 “위생키트를 급히 조달하기 위해 한국의 관련 대기업들에게 긴급 주문을 요청한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세아상역은 지난 2012년 8월 전남대병원 의료봉사팀과 함께 카라콜, 떼이헤후주 지역에서 주민 4000여 명을 대상으로 무료 진료를 전개했다. 아이티 주민들 중 병원을 한 번도 안 가본 사람이 수두룩했고, 간단한 응급치료만으로 큰 효과를 본 경우도 많았다. 예를 들어 트라코마(전염성 결막염의 일종)에 걸린 여러 주민들이 제대로 앞을 볼 수 없었다가 세아상역 의료진의 치료를 받고 시력을 회복하기도 했다. 의료봉사의 중요성을 깨달은 김 회장은 보다 체계적인 지원 방안을 강구했다.
2014년부터 클린턴 글로벌 이니셔티브, 조지워싱턴대 간호대학, 부산대 양산병원 등 글로벌 파트너십을 통해 아이티 의료활동의 폭을 넓혔다. 26명의 의료 전문가들은 소아과, 이비인후과, 피부과, 안과, 가정의학과 등 다양한 분야의 의료진들로 구성돼 평소 적절한 치료를 받기 어려웠던 현지 주민들을 집중 진료했다.
김기명 글로벌세아 대표는 “기업이 현지화를 전개하려면 지역사회와의 교류는 필수”라며 “그 사회에 꼭 필요한 사회공헌활동을 진정성 있게 펼칠 때 단순히 현지 노동력을 이용하는 외국기업이 아니라 국민기업으로 거듭나게 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세아상역을 바라보는 아이티 현지인들의 시선이 상당히 따뜻하다는 것을 현지 취재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카라콜 산업단지 내 생산공장에서 향후 2만 명까지 고용하게 되면 세아상역과 관계가 없는 카라콜 주민을 찾는 게 어려울 정도로 절대적인 위상을 차지하게 될 전망이다. 세아상역 근로자들이 버는 임금은 이 지역 경제를 굴러가게 만드는 윤활유가 될 수 있다. 이 회사가 아이티 경제와 미래 비전을 위해 함께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수준까지 올라선 만큼 세아상역의 사회공헌활동에 대한 아이티인들의 기대도 높다.
세아상역은 아이티뿐 아니라 코스타리카, 인도네시아, 과테말라 등 모든 거점에서 기업의 사회적책임(CSR) 활동을 벌이고 있다. 학교, 탁아소, 아동보호센터, 여성인권보호 등 지역 내 사회복지시설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현지 세아상역 근로자들과도 소통을 강화하는 추세다. 세아상역 과테말라 지사는 여성 근로자들에게 무료로 자궁암 검사를 실시해 큰 호응을 받았고, 컴퓨터 교실을 운영해 현지인들의 정보기술(IT) 마인드를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다. 해외 개도국에서 다양하게 펼치고 있는 세아상역의 ‘맞춤형 사회공헌활동’은 한국 기업들의 해외 CSR 부문에서 하나의 좋은 표본이 되고 있다. 김기명 대표는 “해외에서 단기적 이익을 좇는 게 아니라 현지 지역사회로부터 오랜 신뢰와 사랑을 받는 기업이 될 수 있도록 중장기적 기여 방안을 계속 모색하겠다”고 다짐했다.
[황인혁 매일경제 뉴욕특파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80호 (2017년 0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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