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원 직원 A씨의 전셋집 주인은 지난 4년간 3번 바뀌었다. 전세 끼고 집을 사는 갭(gap)투자에 나선 3명의 투자자 때문이다. A씨가 10여 년간 모은 돈은 1억5000만원. 전세·신용대출로 마련한 전세금 4억원은 의도치 않게 갭투자자 종잣돈으로 활약했다.
두 번째 이후 집주인의 얼굴은 본 적도 없다. 투자자들이 집도 안 보고 집을 사서다. "전세금이 정확히 이 금액이냐"는 은행 직원의 연락을 한 번 받은 정도다. 전세금 제외 담보가치로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한 20대 갭투자자 때문이다. A씨는 여전히 집을 사기 어렵다. 7억원 안팎 아파트를 사려면 취득세까지 5억7000만원을 빌려야 하는데 대출을 집값 70% 이내로 묶는 담보인정비율(LTV) 규제 때문이다. 긴 기간 나눠 갚으면 대출 원리금은 연봉의 30%에 불과하고 A씨 직장인 금감원에서도 33% 정도의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TI·연간 원리금상환액/연소득)은 세계적으로 문제없는 수준이라고 보고 있지만 금감원 직원인 A씨는 집값 30%가 없으면 집을 살 수 없다는 팩트를 정확히 알고 있다. A씨가 돈을 빌릴 수 없는 동안 갭투자자들은 꾸준히 돈을 벌었다.
부채증가세가 소득증가세를 꾸준히 웃도니 금융위원회가 올해 초 업무보고에서 신(新)DTI라는 것을 도입하겠다고 했다. 대출 기간 전반의 실질적인 상환능력을 따져 DTI의 분모를 탄력적으로 적용하겠다는 얘기다. 신입사원도 장기대출을 받으면 차장급에 준하는 대출을 받을 수 있다. 성과급 등 일시적 소득이 많으면 한도가 줄어드는 등 소득산정체계가 합리화되니 은행 건전성도 좋아진다. '빚 내서 집 사라는 얘기냐'는 우려가 나오는데 기자는 적어도 그 점만큼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얘기하고 싶다. 은행을 걱정하는 LTV 규제(70%) 때문에 갚을 수 있어도 빌릴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걱정할 것은 이 대목이다. 서민대출을 표방하는 집값 5억원 한도(대출금 3억원 한도)의 디딤돌대출 역시 2억원이 없는 정상적인 젊은 층에게는 '서민대출 코스프레'나 다름없다. 오히려 부모에게 2억원을 증여받은 금수저가 3억원을 빌리는 데 악용되기도 한다. 생애 최초 주택구입자에게 많게는 95%의 LTV를 적용하고 투자자에게는 50%로 이 비율을 확 낮추는 해외 사례는 은행 건전성을 포기했기 때문인가. 집값이 30% 폭락하지 않는 이상 원리금을 챙기게끔 은행만 걱정해주는 동안 주택시장에서 꼬리 칸과 엔진 칸은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게 실효성 있는 신DTI 정책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
[금융부 = 정석우 기자 swjung@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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