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나 지금이나 재소자들은 이름 대신 ‘수용번호’로 불린다.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 같지만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재소자 배려 차원이 더 크다. 1999년 5월부터는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에 따라 미결수는 사복을 입고 출정(出廷)할 수 있게 됐다. 아크릴 인식표를 달고 법정에 나온 것도 이때부터다. 노약자나 여성 미결수는 포승도 안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달리 포승을 안 한 이유다.
▷23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국정 농단 재판에 참석한 박 전 대통령의 왼쪽 가슴에도 둥근 인식표가 달렸다. ‘나대블츠 서울(구) 503.’ 암호 같은 약어엔 교도관만이 아는 수용자의 핵심 정보가 숨어 있다. 공범부호라고 부르는 ‘나(국정 농단) 대(대기업) 블(블랙리스트) 츠(스포츠)’는 주요 범죄 혐의를 나타낸다. 남성은 검은색, 여성은 빨간색으로 쓴다. ‘서울(구)’와 ‘503’은 수용 장소와 수감번호다.
▷수용자 정보를 담은 인식표를 재소자가 패용하도록 하는 것은 효율적인 계호(戒護)를 위해서다. 교도소 내에서 운동, 면회를 하거나 법정에 나갈 때 마주치는 기회를 이용해 재소자끼리 입을 맞추면 안 되기 때문이다. 2012년 7월 불법자금 수수 혐의로 수감된 이상득 전 의원은 3000여 명을 수용 중인 서울구치소가 공범들의 출정이나 운동, 면회 때 한 번도 마주치지 않게 하는 것을 보고 탄복했다고 한다. 공범부호는 외부는 물론이고 재소자끼리도 알게 되면 안 된다. 서울구치소는 국정 농단 공범부호를 바꿀 것을 적극 검토 중이다.
▷비록 초유의 국정 농단 사태로 대통령이 파면, 수감됐지만 마치 잡범처럼 수용자 인식표를 달고 법정에 출두하는 모습을 봐야 하는 국민의 심기는 편치 않다. 서울구치소 역시 많은 고민을 했지만 떼고 출정할 경우 특혜 논란을 더 우려했다고 한다. 법불아귀(法不阿貴·법은 신분이 귀하다고 아부하지 않는다)라는 점에서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렇다면 미결수가 호송차에서 내리거나 법정에서 일반 국민에게 공개되는 때만이라도 인식표를 붙이지 않도록 하는 건 어떨지 모르겠다.
하종대 논설위원 orion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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