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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기고]영혼 잃고 껍데기만 남은 ‘공각기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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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영화란 무엇인가? 영화가 현실의 완전성을 복원하는 예술이라고 말한 사람은 1960년대의 앙드레 바쟁이었다. 하지만 2017년의 할리우드 영화 <공각기동대>는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과 스펙터클 이미지를 앞세워 기계 인간 시대의 고통스러운 현실적 고민을 지운다. 남는 것은 영화의 존재론을 잃고 방황하는 테크놀로지의 환상과 생뚱맞은 휴머니즘일 뿐이다.

경향신문

이 영화는 1989년 시로 마사무네의 일본 망가 <공각기동대>가 원작이다. 다소 가벼운 분위기의 이 원작 만화를 토대로 1995년 오시이 마모루의 2D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가 만들어진다.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는 ‘기계도 영혼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사이보그 구사나기는 강물을 따라 서서히 흘러가는 배 위에서 껍데기 육신에 깃든 인간적 영혼과 자신의 정체성을 회의한다. 이 장면은 가와이 겐지가 작곡한 음울한 일본 전통 음악의 곡조를 따라 기나긴 롱테이크의 느린 영상으로 흘러간다. 애니메이션 역사상 기계 인간의 실존적 고민을 묘사한 최고의 명장면일 듯하다. 또한, 구사나기와 인형사의 융복합 합체를 묘사하는 마지막 장면은 어떠한가. 구사나기와 인형사는 이제 인간도 기계도 여자도 남자도 아닌 새로운 존재로 태어난다. 인간과 기계의 대립을 넘어 ‘광대한 네트의 세계’ 속으로, 컴퓨터 네트워크 시대의 새로운 영혼으로 나아간다. 거기에는 차가운 물속을 낙하하는 기계 인간 구사나기의 실존적 선택이 숨쉬고 있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인간적 독단을 넘어서는 포스트휴먼의 사이보그 세계관이 태어난다. 인간, 동물, 기계의 정체성을 절대적으로 단정짓지 않으려는 미래의 가치관이 꿈틀댄다. 이미 현대 과학은 인간과 생명체가 DNA 정보의 전기적 흐름일 뿐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생물과 무생물, 인간과 기계, 생명과 정보 네트워크가 융합하는 새로운 미래적 가치관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공각기동대>는 어떤 새로운 질문을 던졌는가? 그것은 질문의 영화라기보다는 상투적 답변의 영화라고 칭하는 것이 더 적절할 듯하다. 그 답변은 너무나 할리우드적이다. 원작 애니메이션과 달리 기계 인간 메이저 미라의 탄생 신화에 집중한다. 쥘리에트 비노슈가 연기한 오우예 박사는 마치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을 창조한 프랑켄슈타인처럼 보인다. 영화는 인간이 자신과 닮은 피조물을 창조하면서 비극에 빠진다는 서구의 익숙한 창조신화에 매달린다. 신이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은 신을 배신하고, 인간은 기계를 창조하고, 기계도 인간을 배반하고, 이 모든 혼란과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영웅이 나타나고, 이제 우리는 안전한 가족의 품과 사랑의 현실로 돌아가야 하고….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점은 이러한 영웅주의 서사가 현란한 액션과 컴퓨터 그래픽을 동원한 ‘기술적 스펙터클’의 눈부신 전시를 통해 포장된다는 사실이다. 루퍼스 샌더스의 <공각기동대>는 현실을 지우는 할리우드 기술 미학을 충실히 계승한다. 여기에서 원작 애니메이션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메시지는 증발한다. 인형사와의 융합을 통해 만물이 뒤섞이는 네트워크의 신세계로 나아가는 원작과 달리, 실사판 영화는 가출소녀 구사나기 모토코의 무덤 앞에서 일본인 엄마를 만나는 과거로의 회귀를 보여준다. 전뇌와 의체로 무장한 사이보그 메이저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다가 결국은 어설픈 휴머니즘과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로 돌아간다. 인간과 기계가 하나 되는 ‘광대무변의 네트’로 나아가는 원작의 대담한 세계관은 사라진다. 기술적 카타르시스로 치장된 물신주의 영화의 막이 내리면, 홀로그램 네온사인이 번득이는 무국적 미래 도시 속에서 광학미체 슈트를 두른 육감적 사이보그 스칼렛 요한슨의 눈부신 낙하 장면만이 관객들의 뇌리에 남겨진다.

다시 처음의 질문, 영화란 무엇인가? 현실과 가상,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무너지는 인공지능과 가상현실의 시대에 영화의 정체성은 새롭게 질문된다. 여기에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공각기동대>는 하나의 역설적 답변을 제시하는 듯하다. 고스트(ghost)가 사라진 자리에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눈부신 특수효과만이 껍질(shell)로 남겨진다. 영혼을 잃고 껍데기만 남는다.

<정헌 | 중부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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