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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족 출신 몽골의 초대 재상
미국의 유력 언론인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즈>, <타임지>는 1990년대 중반 20세기를 마감하며 ‘지난 1000년 동안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을 선정했는데, 세 매체의 각 1위는 동일한 인물이었다.
칭기스칸. 그는 몽골 부족을 통일하고 불과 200만 명의 국민, 약 10만 명의 군대로 중국 대륙, 남아시아, 인도, 중동, 러시아, 동유럽을 정복하며 한 시대를 지배했다. 칭기즈칸의 세계 정복 전쟁이 가능했던 요인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중 대표적인 것이 있다. 첫 번째는 화살 한 발이라도 쏘며 저항하는 적은 물론 그곳에 사는 동물까지 모두 학살하는 공포의 초토화 작전이고, 또 하나는 인종, 나라, 부족 구분 없이 정복민도 필요하면 등용해 인재로 키워낸 글로벌 감각이다. 그리고 정복지에 몽골식 제도와 전통을 강요하지 않는 유연함도 있다. 칭기즈칸의 이러한 정책 즉, 중원에서의 ‘한화 漢化’는 부족 국가였던 몽골의 원나라 건국과 중원의 안정적 지배로 연결되었다.
이 과정에서 칭기즈칸과 그 후계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 있다. 그는 몽골의 대학살을 멈추게 했고, 농경을 장려했으며, 유학을 도입해 학자를 양성하면서 왕권을 강화했다. 또한 법령과 세금제도를 마련하는 등 한마디로 원제국의 모든 제도와 통치 이념을 마련한 인물이다. 그 주인공의 이름은 야율초재이다. 그의 역할은 촉나라 유비의 제갈량, 한나라 고조 유방의 장량과 소하, 당 태종의 방현령과 같았다. 이 모든 역할을 혼자서 담당한 ‘위대한 2인자, 참모’였던 야율초재의 위대함이 돋보이는 것은 그가 몽골의 황족, 귀족 출신이 아닌 피정복민 출신이라는 점이다. 그는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황족 출신으로, 요나라를 정복한 금나라에서 관리를 지냈으며 이후 금나라를 정복한 원나라의 칭기즈칸에게 스카우트되어 원나라의 건국과 번영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다. 온갖 태생적 불리함을 딛고 재상이 되어 능력과 경륜을 펼친 야율초재. 그는 원나라 창업자인 태조 칭기즈칸, 2대 황제인 예종 툴레이, 그리고 원나라의 기초를 완성하고 전성기를 연 3대 황제 태종 오고타이 그리고 오고타이 사후 그의 여섯 번째 황후로 섭정을 했던 내마진 황후까지 4대를 보필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정치가, 재상, 교육자, 군사전략가, 간관의 모든 역할을 다했고 항상 겸손과 배려 그리고 원칙을 지키며 청렴하고 검소한 관리로 일생을 지냈다. 칭기즈칸이 오고타이에게 “야율초재는 하늘이 우리 가문에게 준 선물이다”라고 극찬할 정도로 그의 능력은 몇몇 곳에 국한되지 않았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 교육, 군사, 의학, 음악, 천문, 지리, 유교, 불교, 도교 등 그의 학문적 깊이와 다양성은 당대 최고였다. 무엇보다 야율초재의 처세에서 본받을 점은 권력지향적인 행태나 권력의 사유화, 부의 축적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었다는 점이다.
야율초재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황제를 올바르게 보필하는 것. 그것이 바로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민생 안정을 도모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물론 야율초재에게도 위기가 있었다. 역대 황제들이 이민족인 그를 신뢰하고 총애하자 수많은 모함이 난무했지만 ‘털어서 먼지 하나 없는 청렴함’과 ‘헌신적인 성실함’으로 이를 극복했다. 비록 원칙을 중요시한 그를 꺼려했던 내마진 황후와 간신들에 의해 배척당해 쓸쓸한 노후를 보내다 55세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약 30년 간 이어진 야율초재의 국가경영으로 원나라가 지속 가능한 왕국으로서의 힘을 비축한 것은 사실이다. 한마디로 야율초재는 장점을 늘리는 것보다 단점을 개선하고 보완하는 ‘비움의 처세학’으로 4대에 걸쳐 무려 30년 동안 경륜을 펼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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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의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
야율초재는 1190년 금나라 수도 중도 인근, 지금의 북경지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요나라를 세운 거란족 야율아보기의 후손으로 아버지 야율리는 요나라가 금나라에게 멸망한 후 금나라에서 상서우승상이라는 높은 관직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는 늦둥이 야율초재를 매우 귀여워했다고 한다. 이름도 <좌전>에 나오는 고사인 ‘수초유재 진실용지(초나라에서 태어났지만 진나라에서 뜻을 펴고 벼슬을 한다)’인 ‘초재진용’에서 따와 초재로 지었다. 거란족 출신인 야율초재가 금나라에서 벼슬을 시작해 몽골제국의 재상이 된 것을 마치 예언한 것처럼 야율초재는 이름과 같은 일생을 보냈다.
야율초재의 어머니는 한족 출신 사대부 집안이었다. 야율초재는 3세 때 아버지를 잃었지만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으로 체계적인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야율초재는 학문에 전념해 유학, 불교, 도교 등은 물론이고 한학, 천문, 지리, 경전, 고사, 역사, 의학 등 모든 분야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성품이 성실하고 머리가 영리해 하나를 배우면 둘을 깨우쳤다. 즉 한족은 아니지만 ‘한화 漢化’된 집안으로 봉건적인 한족 사대부와 다름이 없는 가풍으로 야율초재는 한문을 자유자재로 읽고 쓰는 것은 물론 시나 서문에도 능통했다.
야율초재는 17세에 관직에 올랐다. 그리고 금나라 관리로서 수도에서 근무했다. 당시 몽골은 칭기즈칸이라는 위대한 지도자가 탄생해 분열된 부족을 통일하고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 금나라는 요나라를 정복했지만 남으로는 남송이, 서쪽으로는 서하가, 북쪽에서는 몽골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금나라의 국력은 서서히 약화되었고 야율초재가 20대 무렵 금나라는 몽골에게 정복당하고 말았다. 실망한 야율초재는 관리로서의 뜻을 접었다. 거란족 출신으로 금나라에서 벼슬을 지내는 것도 그리 탐탐치 않았는데 이제 몽골의 지배까지 받게 되자 가슴에 품은 큰 뜻을 펼칠 수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야율초재는 불교에 귀의했다. 불교를 연구한 그는 나름의 가치관을 정립했다. 훗날 이것이 그의 국가경영, 인생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바로 ‘무엇인가 원하는 것이 잘 안 될 때는 일단 마음을 다스린다’ ‘마음이든 사람이든 인의로 대하고 다스린다’는 두 가지 신념을 깨달은 것이다.
1215년 칭기스칸은 금나라에 학식과 인품이 뛰어난 인재가 있다는 소문을 듣는다. 그가 바로 야율초재였다. 칭기즈칸은 야율초재를 불러 회유했다.
“네가 본래 거란족임을 알고 있다. 내가 금나라 황족을 죽여 거란이 세운 요나라를 멸망시킨 원수를 갚아줄까?”
“이미 요나라는 멸망했고 저의 할아버지, 아버지가 머리가 숙여 금나라에서 벼슬을 했습니다. 조상이 금나라를 섬겼는데 어찌 제가 사사로운 복수를 원하겠습니까?”
칭기즈칸은 야율초재의 대답을 듣고 감탄했다. 그의 원칙, 배려, 의리의 자세를 높이 산 것이다. 칭기스칸은 그 자리에서 야율초재를 자신의 비서인 서기로 임명하고 그를 중하게 쓰기 시작했다. 야율초재는 타고난 재주와 능력으로 칭기즈칸에게 꼭 필요한 것을 ‘맞춤 제공’했다.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법률 등 모든 분야에서 야율초재는 칭기즈칸의 ‘움직이는 백과사전’이었다. 칭기즈칸은 점점 야율초재에게 빠져들었다. 심지어 그의 훤칠한 외모와 수염마저 마음에 들어 몽골어로 ‘우르츠사하리, 긴 수염’이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였다.
야율초재에 대한 칭기즈칸의 신임이 두터워질수록 몽골 무신들의 질투와 모함은 커져갔다. 그중에서 명궁으로 유명한 상팔근이란 장수가 야율초재를 비웃었다. “지금은 전쟁터에서 칼을 쓰고 활을 쏘는 장수가 필요하지, 야율초재처럼 글이나 읽는 선비가 쓸모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야율초재가 바로 대답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활을 잘 쏘려면 화살을 잘 만드는 기술자가 필요하듯이 천하를 얻기 위해서는 문신과 무신 모두 필요합니다. 또한 천하는 말 위에서 얻을 수 있으나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말 위에서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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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제도 대신 폐단을 줄여라
칭기즈칸은 정복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서역을 거쳐 서방을 원정할 때 야율초재는 칭기즈칸의 정치 및 군사 고문으로 참전했다. 무려 6년간의 원정에서 야율초재는 칭기즈칸의 위대함과 잔인함을 동시에 보았다. 대도시 헤라트를 점령하고 120만 명을 모조리 학살했다. 적이 반항을 하면 모조리 죽이고, 투항하면 살려주는 칭기즈칸의 군사정책은 두려움과 공포심을 안겨주었다. 1227년 서하를 정벌하고 금나라 원정길에 올랐던 칭기즈칸은 병으로 그만 죽고 말았다. 몽골은 막내아들이 후계를 잇는 전통이 있었다. 하지만 칭기즈칸은 이미 자신의 후계자로 셋째 아들 오고타이를 점찍었다. 그리고 오고타이에게 “야율초재는 하늘이 우리 가문에게 준 선물 같은 인물이다. 향후 칸의 자리에 오르면 그를 중용하고 그의 뜻에 따라 국정을 펼치라”고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칸의 자리는 한시도 비워둘 수 없는 법. 막내아들 툴레이가 국정을 맡았다. 야율초재는 긴밀하게 움직였다. 그는 몽골 최고부족회의인 쿠릴라이를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칭기즈칸의 유언과 뜻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자칫 몽골 부족, 네 명의 칭기즈칸 아들 간 내분이 일어날 수 있었다.
여기서 야율초재의 능력이 발휘되었다. 툴레이는 칸의 자리를 형 오고타이에게 내어주는 것을 주저했다. 회의는 40일이 넘게 계속되었다. 야율초재는 툴레이에게 말했다. “칸의 자리는 종묘사직과 몽골 제국 건설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자리입니다. 태조이신 칭기즈칸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툴레이는 며칠 생각할 시간을 달라했지만 야율초재는 몽골인들의 미신까지 이용했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길일이 없습니다.” 결국 툴레이는 칸의 자리를 오고타이에게 양보했다.
야율초재는 즉위식 날 오고타이의 형 차가타이를 찾았다. “사적으로는 오고타이 칸의 형이 되시지만 공적으로는 신하가 됩니다. 즉위식에서 둘째 왕자이신 차가타이께서 무릎을 꿇고 오고타이 칸에게 신하의 예를 올리십시오. 그래야 몽골이 통일되고 안정된 국정을 운영할 수 있습니다.” 차가타이는 야율초재의 당부대로 동생인 오고타이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것으로 몽골의 내분은 모두 가라앉았다. 훗날 차가타이는 “야율초재가 진짜 충신이다. 그의 지혜로 우리 집안은 물론 몽골은 다시 살아난 것이다”라고 칭찬했다. 오고타이는 야율초재를 신임하고 중용했다. 오고타이는 야율초재에게 “나는 태조가 이룩한 대제국을 개혁하고 발전시키려 합니다. 좋은 방안을 알려주세요”라고 자문을 구했다.
“여일이불약제일해 與一利不若除一害, 생일사불약멸일사 生一事不若滅一事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한 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은 한 가지 해로운 일을 제거하는 것만 못하고, 한 가지 일을 또 만들어내는 것은 한 가지 일을 줄이지 못하는 것만 못하다는 뜻입니다. 칸의 자리에 오르면 무엇이든 업적을 만들기 위해 조바심을 갖고 일을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정치란 기존의 제도나 법을 개선했을 때 효과를 볼 수 있지, 새로운 제도나 법을 또 만들어내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새로운 규제를 만드는 것보다 과거의 단점, 폐단을 없애는 것이 더 현명한 정치입니다.”
오고타이는 야율초재에게 몽골의 제도나 법령, 문화, 교육, 군사 등에 관한 모든 개혁을 맡겼다. 야율초재는 중국식 제도의 도입을 추진했다. 그것이 바로 ‘한화 漢化’였다. 그리고 급격한 중국식 제도 도입에 따른 부작용과 반발을 줄이기 위해 몽골의 전통 제도는 보존했다. 야율초재는 몽골군의 과격, 잔인함을 줄이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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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30년간 원나라의 기틀을 마련하다
1229년 오고타이는 한족의 농사짓는 땅을 모두 없애고 이를 초지로 개발해 몽골의 목축업을 장려하자는 신하의 건의를 수용했다. 이에 야율초재는 반대했다. 야율초재는 반대 의견을 제시할 때 항상 ‘더 나은 방법’임을 강조했다.
“국고를 채우기 위해 농사를 폐지하고 목축업을 장려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더 좋은 것은 한족에게 농사를 계속 짓게 하고 그들의 수확에 따라 세금을 거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속적인 국고 수입원이 생기게 됩니다.”
오고타이는 야율초재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1년 뒤, 야율초재의 의견대로 막대한 세금이 국고로 들어왔다. 오고타이는 크게 기뻐했고 더욱 더 야율초재를 신임하게 되었다.
1231년 오고타이는 금나라 수도 변경에 초토화 작전을 지시했다. 즉 변경의 모든 백성과 짐승, 식물조차 없애라는 것이었다. 야율초재는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폐하, 이렇게 정복전쟁을 하는 것은 땅과 백성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모조리 백성을 죽이면 정복전쟁을 하는 의미가 없습니다. 더구나 변경은 한 나라의 수도입니다. 솜씨가 뛰어난 기술자들과 진기한 천하의 문물이 다 모여 있습니다. 그들을 활용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더 효율적입니다. 모조리 죽이면 폐하는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습니다.” 야율초재의 이 건의로 금나라 수도 변경 140만 명의 백성들은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다. 오고타이는 금나라 황족과 고위 관리들만 처형하고 백성들은 모두 살린 것이다. 이후 항복하지 않는 백성을 모조리 학살하는 몽골의 전통은 폐지되었다. 야율초재는 오고타이를 설득하는데 무조건 반대의견부터 내지 않았다. 대신 선택을 하게 하는 방법을 제시해 오고타이가 스스로 더 좋은 정치, 더 나은 선택을 하게 했다. 이는 몽골의 황족과 귀족들의 반발을 억제하는 효과도 있었다. 야율초재는 오고타이에게 서슴지 않고 ‘반대 의견’을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물론 야율초재의 이런 선비기질로 인해 위기도 있었다.
한번은 오고타이가 총애하는 황족을 야율초재가 체포했다. 오고타이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해 야율초재를 가두었다. 그리고 얼마 후 야율초재를 석방했다. 그를 가둘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야율초재는 모든 대신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오고타이에게 정면으로 반박했다.
“폐하, 어제 신은 체포되었다가 바로 석방되었습니다. 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신이 죄가 있기 때문에 체포한 것이고 또한 석방했다는 것은 신에게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가 없다면 왜 신을 체포했으며 죄가 있다면 왜 신을 석방하셨습니까?”
모든 신하들은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오고타이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황제의 신임이 두터운 야율초재이지만 이렇게 정면으로 반발하는 것을 황제가 용서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고타이는 잠시 숨을 고르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무리 황제이지만 어찌 실수나 과오가 없을 수 있겠는가. 그 문제는 내가 실수한 것 같으니 이해하시오.”
봉건시대, 황제는 범인과 다른 신격인 존재이다. 즉 황제는 실수를 해서도 안 되고 실수를 해도 그 실수를 인정할 수 없는 위치인데 황제가 신하에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까지 한 것이다. 모든 대신들은 깜짝 놀랐다. 이 정도로 오고타이는 대범했고 또한 야율초재를 아낀 것이다. 훗날, 오고타이가 야율초재에게 술을 주며 “그대가 없었다면 어찌 지금과 같이 중원과 변방이 안정될 수 있었겠는가. 내가 지금 편하게 잠들 수 있는 것은 다 그대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그릇이 큰 황제에 그 신하인 셈이다.
1241년, 태종 오고타이가 죽었다. 야율초재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사라진 것이다. 권력은 오고타이의 여섯 번째 황후인 내마진이 장악했다. 그녀는 오도랄합만을 총애했다. 충신의 시대가 가고 간신의 시대가 온 것이다. 조정은 태종과 야율초재가 피와 땀으로 이룩한 열매를 따먹기만 하며 점점 부패해졌다. 더구나 황후와 손잡은 몽골의 황족과 귀족들은 야율초재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원칙보다는 변칙이, 공정과 정의보다는 독점과 편중이 더 편하게 다가온 것이다. 내마진 황후는 옥새가 찍힌 백지를 오도랄합만에게 주었다. 오도랄합만은 마음대로 그 안에 써넣었다. 법, 제도, 인사 모든 것이 그의 마음대로였다.
황후는 명령을 내렸다. “오도랄합만이 입안한 것은 모두 기록하고 그대로 처리하라. 만약 그 명을 어기면 손목을 자르겠다.” 야율초재는 예의 대쪽 같은 성품을 감추지 않았다. “돌아가신 태종께서 모든 국사를 신에게 위임했습니다. 황후와 오도랄합만의 명령이 합당하면 당연히 실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온당치 않으면 실행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까짓 손이 잘리는 것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신은 태조, 태종을 모시고 무려 30년 동안 이 나라를 위해 봉사하면서 한 번도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거나, 실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신을 황후께서는 배척하시고 또한 죽이려 하십니까?”
결국, 야율초재는 조정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태종 오고타이가 죽은 지 2년 뒤인 1243년 55세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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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세학 | 장점은 1년, 단점은 10년을 따라 다닌다
몽골 초대 재상으로 활약한 야율초재의 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태조 칭기즈칸, 예종 툴레이, 태종 오고타이는 물론 내마진 황후를 모시며 약 30여 년을 정치의 최일선에서 활동했다. 그는 몽골의 제도 정비와 개혁 그리고 통치 이념을 완성했다. 제국의 형성기인 칭기즈칸 시대에는 정치군사 참모로 활동했고 오고타이 재위기에는 중앙집권 확립, 유교를 근본으로 과거, 교육제도 정비를 통한 통치 원칙 확립, 조세제도 정립, 농업 발전, 각종 법령 정비와 확립으로 법치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와 같은 야율초재의 활약으로 몽골 지배에 대한 한족의 공포심을 줄일 수 있었다. 이는 원활한 국정 안정을 도모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야율초재는 인종, 국가, 신분을 뛰어넘는 몽골의 통치 체제와 인재 등용의 상징이었다. 거란족 출신, 금나라 관리에서 몽골의 재상 자리까지 오른 야율초재를 보며 수많은 이민족, 한족 출신들이 원나라 관료가 되는데 부담과 거부감을 없애고 적극적으로 임할 수 있다.
무엇보다 야율초재에 대한 칭기즈칸과 오고타이의 신뢰는 상상 이상이었다. 정치, 군사, 경제, 법률, 문화, 교육, 철학 등 모든 분야에서 두 황제는 야율초재를 참모가 아닌 스승의 자세로 대했다. 그럴수록 야율초재는 사욕을 억제하고 개인적인 권력 형성과 행사를 절제했다. 그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었고 날이 선 반대보다는 온화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비판으로 몽골 귀족과 황족의 반대와 질시를 넘어설 수 있었다. 물론 황제에 대한 직언이나 관리들의 부정부패, 백성에 대한 지방관의 폭정에는 단호했다. 그 상대가 황제가 총애하는 권신이나 황족이라 할지라도 처벌에 예외를 두지 않았다. 그렇기에 황제는 그를 신뢰했고, 황족과 귀족 등 지배층은 야율초재를 두려워했으며 백성들은 그를 존경하고 사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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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점을 늘리지 말고, 단점을 줄여라
장점이 많은 대신 단점도 많은 직원, 단점은 없는데 그렇다고 장점도 많지 않은 직원, 과연 둘 중에 누구를 오른팔로 쓰고 싶은가? 이 질문에 대답은 엇갈릴 수 있다. 부서장의 성격, 부서의 업무 내용은 물론 회사의 사풍까지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수의 리더는 장점이 많은 직원보다 단점이 없는 직원을 선택하게 된다. 특히 회사가 안정되고, 성장기에 있다면 더욱 그렇다. 초창기 창업의 과정에서는 각 방면의 다양한 인재의 필요성으로 장점이 부각될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아직 기반이 단단치 않은 조직의 특성상 실수와 오류를 줄일 수 있는 ‘리스크 관리’에서 단점이 없는 직원을 더욱 선호하게 된다.
단점이 없다는 것은 신뢰, 믿음, 예측 가능한 결과물 생성과 직접 관련된다. 리더의 의견과 뜻을 받아 이를 실행하는데 최대의 성과보다 최소의 지출과 위험 요소를 줄이는 것은 ‘거품이 낀 숫자놀음의 성과’보다는 ‘실제적인 성과’를 체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성과는 당연한 것이고 그 공은 인정받지만 실효 기간은 생각보다 짧다. 이를테면 올해 10억 원의 목표를 달성했다면 내년에는 당연히 15억 원이 목표가 되는 것이다. 즉 목표지향적인 성과주의에서 소위 ‘약발’은 1년도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실수와 오류는 그 파장의 규모와 상관없이 평생 인사기록에 남게 된다. 쉽게 말해 학교나 사회에서 받은 수많은 표창보다 본의든, 본의 아니든 한 번의 실수로 얻게 되는 ‘빨간 딱지’가 평생을 따라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다. 참모는 리더의 단점을 보완하고 오류를 시정하고, 실수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주 임무이다. 마찬가지로 참모의 몸가짐 역시 다양한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백과사전식’ 능력도 중요하지만 신은 인간에게 그런 재주를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단점을 줄이는 방법이 참모로서 더 효과적이다. 그것에는 자기 절제와 명확하고 객관적인 자기 인식이 필요한 것이다. 단점은 업무적인 것 이외에 사적인 생활, 대인관계 등에서 더 부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내 단점 중 가장 치명적인 것부터 약한 강도로 나열해 보자. 그리고 하나씩 시간을 갖고 줄일 수 있는 것을 찾아보자. 의외로 조금의 노력만으로도 이 ‘단점 리스트’를 줄일 수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글 박기종(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픽사베이]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576호 (17.05.0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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