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9.25 (수)

[의당 학술상] 의학자·교육자·병원경영자·시민운동가로 동분서주 … 우리나라 의학계에 큰 족적 남긴 '거대한 산'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함북 명천 출생, 서울대 의대 1회 졸업

한양대 병원 개원 때 기획부의료원장

대통령표창 등 의학부문 다수 수상

의당 김기홍 박사는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고(故) 의당(毅堂) 김기홍(金箕洪) 박사는 국내 진단검사의학의 초석을 다진 의학자이자 교육자였고 탁월한 병원경영자였다. 또 헌혈운동을 전개한 시민운동가였다. 대한혈액학회장·대한병리학회장·대한임상검사정도관리학회장·대한의학협회부회장·대한임상병리학회장·대한수혈학회장·대한헌혈협회장·대한혈액관리협회장 등을 역임한 데서도 그가 남긴 큰 족적을 짐작할 수 있다. 1986년 7월에는 대한민국학술원 정회원에 임명됐다.

◆ 평생 의학 매진, 학술원 정회원에 추대=의당은 일제강점기던 1921년 2월 함북 명천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대학 예과 성격의 히메지고등학교를 거쳐 1942년 9월 동경제국대학 의학부에 입학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944년 8월 한국으로 돌아왔으며, 다음해 8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 편입했다. 의당은 1947년 7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제1회로 졸업하고 1948년 3월부터 서울의대 위생학교실 조교로 일하며 석사과정을 밟았다.

중앙일보

의당 김기홍 박사는 의학자·교육자?병원 경영자로, 또 헌혈운동을 전개한 시민운동가로 큰 족적을 남겼다. 사진은 한양대 기획부의료원장 으로 재직할 당시 모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군의관으로 1950년 12월 입대해 수도육군병원에 배속됐다. 전황에 따라 여러 번 근무지가 바뀌었는데, 휴전협정 후 서울로 돌아오자 병리실험실 책임자로 자리 잡았다. 미국 레터만(Letterman) 육군병원에서 연수했으며, 이때 임상병리학(현재 진단검사의학)을 필생의 과제로 삼기로 결심했다.

의당은 군복무를 마치고 국립의료원 창설에 참여했다. 1958년 10월 의무사로 국립중앙의료원 임상시험과 근무를 명 받아 국립의료원 생활을 시작했으며 다음해 1월 의무관으로 임명됐다.

그후 1960년 10월, 의당은 수도의과대학 교수로 자리를 옮겨 교육자로 역할을 넓혔다. 수도의대가 우석대학으로, 우석대학교가 고려대학교로 통합되기 직전까지 교무처장·부속병원장을 역임하며 학교 발전에 기여했다. 수도의대 근무 중이던 1962년 8월 서울대학교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의당은 1972년 2월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겸 부속병원 기획실장을 맡게 된다. 한양대는 1972년 4월 한양대학교병원을 준공했으며, 개원과 함께 의과대학과 한양대학교병원을 총괄하는 한양대학교의료원을 창설했다. 이와 함께 의당은 기획부의료원장으로 발령돼 중요 정책의 결정, 인사, 재정 등을 총괄했다. 1980년 6월에는 한양대 의과대학장에 취임해 기초의학 교수요원 확충에 힘쓰는 등 의과대 발전에 힘을 쏟았다. 의당은 “임상교수가 돼 환자 진료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초의학을 전공하는 것은 한국의 의학도로서 한국 의학 발전에 기여하는 길”이라고 제자들에게 강조했다. 이어 1983년 3월 한양대 병원장으로 발령받아 연임을 하고 정년을 앞둔 1986년 2월 물러났으며, 명예교수로 추대됐다.

의당은 1985년 8월 췌장암 수술을 받고 투병 끝에 1986년 12월 5일 한양대학교병원에서 영면에 들었다. 장례식은 한양대 의과대학장으로 거행됐다. 향년 66세였다.

◆국내 진단검사의학 발전에 기여=의당은 8년간 군복무를 하면서 미군의 의료시스템과 기술을 보고 겪었으며 임상병리 분야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한다. 이 과정에서 쌓은 임상병리검사 지식과 경험을 진료·연구·교육에 접목해 한국 의학 발전에 밑거름이 됐다. 군복무 중에는 수도육군병원의 병리검사실 현대화를 추진했다. 수도의과대학에서는 검사실의 중앙화, 독립된 임상병리학교실 정립을 위해 힘쓰는 한편 의학기술초급대학 신설을 통한 임상병리사 양성제도 마련에도 공헌했다. 한양대로 자리를 옮겨서는 한양대병원 임상병리과검사실을 당시로서는 최대 규모에 최고의 검사장비·시설·환경을 갖출 수 있게 했다. 특히 중앙검사실제도보다 더 광범한 임상병리검사실 체계를 구축했다. 임상병리사의 자질 향상에도 적극 나섰다.

또 대한임상검사정도관리학회와 대한임상병리학회의 발족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초대회장을 맡아 초석을 다졌다. 대한임상검사정도관리학회는 1976년 8월 창립됐으며, 전문의의 학술활동과 정도관리(精度管理) 사업을 통해 임상검사의 신뢰도를 제고했다. 의당은 1980년 10월 대한임상병리학회가 출범하기까지에도 크게 기여했다. 임상병리학회 발족은 임상병리학이 전문 분야 학문으로 인정받게 됐음을 의미하는 것이자 추후 발전의 기틀이 되기도 했다. 의당은 1984년 대한의학협회에 정규 학술단체로 가입하는 것까지 마무리하고 회장직을 물러났다.

의당은 임상병리사를 임상병리를 전문으로 하는 의사와 협력관계에 있는 동료로 보았다는 점에서도 남다른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는 평을 듣고 있다.

◆헌혈운동 전개=의당은 헌혈 운동을 전개해 매혈 풍토를 타파하고 치료에 필요한 혈액의 공급이 헌혈을 통해 이뤄질 수 있는 바탕을 확립하는 데도 기여했다. 1971년 5월부터 헌혈운동의 모체가 된 한국헌혈협회 회장을 맡았고, 혈액관리 개선을 위해 1975년 7월 발족한 대한혈액관리협회의 회장으로도 활약했다.

◆탁월한 병원경영자=의당은 또 병원 경영 면에서도 탁월했다. 1968년 8월 우석대학교 병원장 발령을 받은 의당은 강력하게 적폐의 청산과 병원 경영 전반에 걸친 합리화를 추진했다.

한양대로 자리를 옮겨서는 기획부의료원장으로서 한양의대의 마스터플랜 작성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또 병원장을 맡아서는 별관 준공, 병상 수 확대, 중앙교수연구실 개설, 방사선필름 창고 준공 등 시설 확충을 이루기도 했다. 이뿐 아니라 병원은 환자를 돌보고 친절하게 서비스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개혁 과제로 삼아 병원 경영 혁신을 추진했다. 의료서비스의 개념을 도입해 병원 경영의 쇄신을 추진한 것이다. 이는 이례적이며 진취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의당은 “치료는 있지만 보살핌이 없다는 말을 듣지 않는 병원이 돼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환자가 병원에 대해 무엇을 요구하는가”에 관심을 가질 것을 직원들에게 촉구했다. CEO로서 의료기관의 공익성에 대한 일반사회의 올바른 이해를 제고하기 위해서도 노력했다.

의당은 제3회 대한의학협회 학술상, 국제라이온스 309-A지구 총재 표창, 대통령표창, 한국화이자 의학연구상, 백남학술상 의학부문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의당이 평생 이룩한 의학적·사회적 업적을 기리기 위한 상은 그의 별세 후에도 이어졌다. 2002년 9월에는 대한수혈학회 학술공로상, 2009년 2월에는 대한임상검사정도관리협회 로슈공로상이 수여됐다.

김승수 객원기자 kim.seungsoo@joongang.co.kr

김승수 기자

▶SNS에서 만나는 중앙일보 [페이스북] [트위터] [네이버포스트]

ⓒ중앙일보(http://joongang.co.kr) and JTBC Content Hub Co., Lt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