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받은 개인에 맡겨두는 방임적 치유가 아닌
모두 함께 공감하는 공동체적 치유를 모색해야
정여울 작가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우리 사회는 상처의 치유를 ‘개인’에게 맡겨버리고, ‘네 상처는 네가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문제와 정면으로 대결하는 것을 회피해 왔다. 하지만 세월호의 트라우마는 결코 개인의 몫으로 치부될 수 없으며, ‘사회적 치유’가 함께할 때만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어디서부터 사회적 치유를 시작해야 할까. 이런 엄청난 집단적 트라우마 앞에서는 모든 치유의 이론이 힘을 잃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상실의 슬픔이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이라는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말했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슬픔의 완전한 수용, 즉 내게 일어난 뼈아픈 상실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아픔이 곧바로 치유되지는 않는다.
상실의 슬픔이 그렇게 정확하게 단계별로 극복되는 것은 아니다. ‘치유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아직 ‘치유’까지는 생각도 못할 정도의 깊은 슬픔을 억지로 봉합하려 한 것은 아닌가. ‘상실을 극복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아직 슬픔으로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억지로 ‘이제 그만 슬픔에서 벗어나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닌가. 슬픔은 제거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다.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상실감 앞에서 제대로 슬퍼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주는 일, 거기서부터 사회적 치유는 시작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고통을 겪는 많은 사람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또 한 번 상처 받는다. 극복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슬픔은 극복된 줄 알았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북받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되살아나며, 다 잊은 줄 알았다가도 되살아나 우리를 괴롭힌다.
심리학자 마크 엡스타인은 『트라우마 사용설명서』에서 붓다의 치유 방식을 이야기한다. 붓다는 말했다. 슬픔에 끝이 있을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이 말에 커다란 위로를 받았다. ‘슬픔이 끝나야 한다’고, ‘슬픔을 잊으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냉정함에 우리가 상처 받았음을 그제야 알았다. 이 슬픔에 끝이 없음을 깨달을 때 그제야 사회적 치유가 시작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서양 심리학에 길들여진 많은 환자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의 뿌리를 알아내면 그것으로 치료가 끝난다고 생각한다. 철저한 인과론적 사고인 것이다. 원인이 밝혀지면 증상이 저절로 치유된다는 기계적인 사고다.
인간은 그렇게 생겨 먹지 않았다. 슬픔은 극복하거나 억제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으며, 슬픔을 억지로 도려내기보다는 슬픔과 ‘함께’ 살아나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감정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하고, 모든 것이 정상인 척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처절하게 상처 입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인생을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마음의 창문이 바로 시련이기에. 아픔은 아픔대로, 후회는 후회대로 풀어줌으로써 조금씩 트라우마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질 테니.
“사람은 죽어도 질문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질문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 사람은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닐 겁니다.” 세월호의 아픔을 온몸으로 감당한 채 세상을 떠난 고(故) 김관홍 잠수사의 목소리를 담은 김탁환의 소설 『거짓말이다』 중 한 대목이다.
‘이 헤아릴 수 없는 상처의 뿌리는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우리의 간절함이 남아 있는 한, 그날 그 배에서 내리지 못한 304명은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정여울 작가
▶SNS에서 만나는 중앙일보 [페이스북] [트위터] [네이버포스트]
ⓒ중앙일보(http://joongang.co.kr) and JTBC Content Hub Co., Lt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