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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3 (수)

[박영순의 나쁜 커피] 18. 그늘재배 커피를 사랑해야 하는 진정한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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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월드

커피나무는 태생적으로 그늘에서 자라도록 돼 있다. 하지만 세계 커피 량의 절반 이상을 생산하는 브라질과 베트남, 심지어 명품커피의 대명사인 하와이 코나에도 그늘 없이 자라는 커피나무들이 지천으로 깔렸다.

커피가 처음 발견된 에티오피아의 카파는 열대산림이 무성하다. 지금도 야생커피를 따러 가는 사람들은 서로 “표범이 나타날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당부인사를 나누고 큰 칼로 나뭇가지들을 내치며 산림 속으로 들어간다. 야생 아라비카 나무는 크다고 해도 6~7m 자란다. 20~30m짜리 나무들 사이에서 파묻히다시피 살아온 것이다. 오랜 세월 이런 조건에 적응하면서 커피나무는 광합성 량이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 ‘광포화점(Light saturation point)’이 낮게 유지되도록 진화했다. 그늘에서도 잘 자랄 수 있게 적응한 것이다.

소나무와 같은 양지식물은 직사광선을 받는 곳에서 잘 생육하는 반면, 커피나무-잣나무-밤나무 등 음지식물은 양지식물에 비해 낮은 ‘최소수 광량’(성장에 필요한 최소한의 빛의 양) 덕분에 조명도가 낮은 상황에서도 정상적인 생산량을 유지할 수 있다. 양지식물은 광량이 적으면 잘 자라지 못하지만, 음지식물은 직사광선을 받아도 살 수 있다는 점에서 생존력이 더 우수하다고도 평가할 수 있겠다.

커피나무가 음지에서도 살고, 양지에서는 더 많은 커피열매를 맺는데도 굳이 그늘재배를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향미보다는 환경보호라는 가치 때문이다. 셰이드 트리를 심어 커피나무에 그늘을 드리워주는 그늘경작법을 통해 생산한 ‘셰이드 그로운 커피’는 직사광선을 그대로 받는 ‘선 그로운 커피’보다 생두의 밀도가 더 뛰어나다. 성장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려진 덕분에 생두 안에 영양분을 조밀하게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직사광선을 받고 자란 커피를 맛이 부족하다고 할 수는 없다. 커피의 맛은 생두에 얼마나 많은 영양분이 농축돼 있느냐에 달렸다. 비료를 통해 영양분을 충분히 공급하고 벌레나 곤충에 해를 입지 않도록 살충제를 뿌리며 키운 커피도 맛이 뛰어나게 좋을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커피 그늘재배의 참 의미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구호에 함축돼 있습니다. 커피 본연의 향미를 내는 것은 자연을 존중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커피가 태초에 살던 모습 그대로 그늘에서 재배하면 무엇보다 커피나무가 튼튼하게 자랄 수 있다. 이 덕분에 병충해와 싸워 이길 수 있게 되고, 강한 생명력은 열매 알알이 영양분을 가득 채워 넣을 수 있다. 생두의 무게는 더 나가고 크기도 더 커진다. 직사광선을 온종일 그대로 받게 하면서 쉴 틈 없이 자라게 하면 나무가 허약해질 수밖에 없다. 나무를 약하게 만들어 놓고는 튼튼하게 자라라고 비료를 잔뜩 부어준다. 한여름 일사병에 쓰러질 것 같은 학생을 그늘에서 쉬게 해주기는커녕 링거를 꽂아 주며 운동장을 뛰라고 채근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렇게 자란 커피가 진정 그윽한 향기를 자아낼 순 없다.

토양은 시간이 흐를수록 황폐해진다. 허약해진 나무가 병충해를 이겨내지 못하니 살충제를 몇 배로 더 뿌려야 한다. 토양 속의 유익한 미생물도 사라지고 점차 곤충과 새들도 사라지게 된다. 생명이 사라진 토양은 화학비료와 약품을 쏟아 붓는 악순환을 거듭하면 살아가야 한다. 세계적으로 커피의 수요를 맞추려고 생산량을 늘리기 위한 경쟁이 벌어진 탓에 그늘 재배하는 면적이 줄어들고 있다. 그 만큼 늘어나는 ‘선 그로운의 땅’은 결국 죽음의 땅으로 변할 운명에 처했다.

커피그늘재배는 그 누구보다 소비자를 요구하는 정신운동이 돼야 한다. 그늘재배 커피를 애용하는 것은 환경보호에 동참하는 지성인의 양식(良識)인 동시에 커피애호가로서 좋은 커피 공급을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지혜다.

커피비평가협회 협회장(Coffee Critics Assoc. President)

사진설명

큰 나무 아래 그늘에서 자라는 커피는 꽃봉오리에서 빨간 체리까지 자라나는 전 과정이 건강하다. 그늘에서 자란 커피가 맛이 더 좋다는 과학적 데이터는 아직 없지만 토양을 자연상태로 유지한다는 점에서 매우 바람직한 재배법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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