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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5 (금)

[시론]‘징벌적 손해배상 제도’ 효과 거두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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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도입하는 환경보건법과 제조물책임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기업이 고의나 중대한 과실과 같은 악의적인 불법행위로 소비자에게 중대한 건강 피해를 입혔을 때 실제 손해액보다 훨씬 더 많은 손해배상을 지워 처벌하겠다는 내용이다. 생활용품 제조와 사용에 있어 기업이 해야 할 위험 관리에 대해 최소한의 경고가 될 수 있다는 면에서 환영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상황에서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제대로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 걱정이다.

경향신문

우선, 제품의 결함으로 발생한 소비자 피해 사례를 국가 규모로 모니터링하는 시스템이 없다. 1994년부터 2011년까지 매년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건강 피해 참사가 일어났지만, 아직까지도 소비자가 입은 신체적 손상, 사고, 건강 피해를 신고할 곳이 없다. 제품의 결함, 기업의 과실, 정부 및 기업의 사고 대응 소홀 등을 알아낼 수 없다. 한국소비자원이 있지만 제품의 하자에 대한 소극적인 대응 정도의 역할에 그치고 있다. 이런 구조에서 제품 사용으로 입은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가 감수해야 한다.

암 등 환경성 질환에 대한 기업, 제품, 장소 등의 연관성을 따지는 것은 현재로선 불가능하다. 화학물질과 제품 사용으로 인한 급성, 만성 건강 피해 사례를 수집하고 감시하는 정부 조직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후진적 국가 공중보건 체계 때문에 2006년 가습기 살균제 피해 질환에 대한 원인 조사 당시 당국은 감염 가능성만을 조사하고 화학물질 중독 가능성은 의심하지 않았다. 개별 피해 사례가 국가 규모로 모여야 원인 제품, 반복성, 유사성 등을 볼 수 있고, 이에 근거해서 기업의 불법행위를 감시하고 처벌할 수 있다.

모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에는 국민이 제품을 사용하다가 손상을 입은 사례를 수집해서 국민 건강을 보호하는 데 활용하는 국가(중독)센터가 있다. 미국에는 56개 주에 국민들이 제품 사용으로 인해 입은 사고, 손상, 건강 피해 등을 자유롭게 신고할 수 있는 센터가 있다. 미국 질병관리본부(CDC)는 피해 자료를 실시간으로 종합하고 분석해서 피해 사례의 원인 규명은 물론 추가 확산을 차단하고 있다.

미국 맥도널드사에 부과된 징벌적 손해배상은 피해 사례 수집 체계의 중요성을 잘 나타낸다. 10여년간 뜨거운 커피로 인해 화상 사고가 700여건이나 반복적으로 발생했지만, 맥도널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에 법원은 회사의 행위를 사고 예방은 물론 발생한 사고조차도 방치하는 악의적인 불법행위로 보고 실제 피해액보다 10배가 넘는 270만달러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판결했다. 만성 질환에 대한 대표적인 징벌적 손해배상은 2016년 미국 존슨앤드존슨사로 하여금 난소암 피해자 두 명에게 각각 550억원, 620억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이다. 이 배상액은 실제 피해액의 6배가 넘는다. 1970년대 초반부터 과학자들은 여성의 베이비파우더 사용이 난소암의 위험을 증가시킨다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회사는 해당 제품이 안전하다는 다른 연구결과들을 들어 이를 무시했고, 소비자들에게도 난소암 발생 위험을 알리지 않았다. 법원은 회사의 이러한 태만을 지적했다. 지금도 존슨앤드존슨사는 난소암 피해자와 관련된 1200여개의 집단소송에 걸려 있다. 우리나라에도 많은 여성이 베이비파우더를 사용하지만 난소암 피해를 조사한 결과는 없다. 피해자 중 일부가 다른 피해자를 대표해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집단소송 제도도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

거대한 국가나 기업 앞에서 소비자 개인의 힘은 상대적으로 미약할 수밖에 없다. 제품 사용에 대한 개인의 피해 사례를 모으고 종합하는 국가 체계가 없다면 집단소송 제도나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는 빛 좋은 개살구가 되기 쉽다. 제도의 도입만으로는 소비자 건강 피해 예방은 물론 보상이 쉽지 않은 이유다. 제품 사용에 있어서 위험 관리의 원리는 매우 간단하다. 위험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고, 통제되지 않거나 의도하지 않은 위험이 일어나면 신속하게 대응해서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다. 수많은 화학물질과 제품 사용에서 나타난 건강 피해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피해 사례 없이 기업의 불법행위를 감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기업은 충분한 피해 사례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책임이 없다고 발뺌하고 사실을 숨기기도 한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물론 DDT, 수은 등 과거 많은 화학물질 사고에서 이미 경험한 사실이다. 제품 사용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은 물론 피해가 발생하더라도 최소화하는 국가 감시 체계를 갖추는 것이 먼저 해야 할 일이다. 그래야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박동욱 | 한국방송대 교수·환경보건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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