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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4 (화)

[하도겸 칼럼] 소동파가 오고 싶어했던 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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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하도겸 박사의 ‘뜻으로 보는 삼국유사’ <6>

◇ 흑수(黑水)와 옥저(沃沮)

말갈과 발해 문헌을 뒤져보면, 흑수(黑水)와 옥저(沃沮)라는 말이 나온다. 중국 송대(宋代) 소식(蘇軾: 1036∼1101) 즉 소 동파(東坡)는 우리가 알고 있는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그 시인 맞다. 이 사람이 효자여서 과거에 장원급제하고도 관리에 부임 안 하고 바로 어머니 삼년상을 치렀다. 상을 치른 후에 동파거사는 아버지, 동생과 함께 고향을 떠나 한수와 장강을 따라 수도 변경으로 갔다. 이 시인 삼부자는 여행 도중 100수가 넘는 시를 짓고는 ‘남행집’이라는 책도 냈다. 여행하기 위해서 물길에도 관심이 많았던 소식은 시간을 내서 우리나라 금수강산에 와보고 싶었을 것이다.

소동파가 지은 지도책인 듯한 ‘지장도’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는 “진한(辰韓) 북쪽에 남과 북의 두 흑수(黑水)가 있다. 흑수는 만리장성 북쪽에 있고 옥저는 만리장성 남쪽에 있다”고 했다.

물 이름이기도 한 흑수를 이름으로 쓰고 있는 종족도 있다. 말갈 7부의 하나인 흑수말갈(黑水靺鞨)은 다른 6부가 발해에 복속되자 726년 발해 몰래 당에 사신을 보내 보호를 요청했다. 당은 이때다 싶어 바로 장사(長史)를 파견하고 흑수국의 이름을 흑수주로 바꾸고 기미주(覊縻州)로 삼았다. 발해 무왕은 당연한 일인데도 힘이 아주 셌던지, 당을 치기 위해 먼저 당과 동맹을 맺은 흑수말갈을 쳤다.

옥저라는 이름을 찾아보니, 고구려 동명제(東明帝)는 왕이 된 지 10년만인 B.C. 28년 북옥저(北沃沮)를 멸망시켰다. 온조왕 42년인 A.D. 23년에 남옥저(南沃沮)의 20여 가호가 신라에 투항했다. 또 혁거세 52년인 B.C.5년에 동옥저(東沃沮)가 신라에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고 했다. 그러니 동옥저란 땅도 있었나 보다.

사실 북, 남, 동은 모두 어느 나라가 이 기사를 기록했느냐에 따라 붙일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도 문헌을 쓴 사람이 어디에 거주했는지에 따라서도 다르다. 보통 수도에 거주했으니 수도 보다 북쪽에 옥저가 있었다면 북옥저가 된다. 그뿐만 아니라 방향이 도치돼 표기될 수도 있다. 남옥저는 옥저의 남쪽지방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따라서 명칭만 다를 뿐 남해안 일부지역에서 보이는 초분(草墳)의 풍속과 같이 복장(複葬) 또는 이차장(二次葬)과 형사취소혼의 풍속을 가진 옥저들은 모두 하나의 나라인 옥저일 수 있다.

◇ 이서국(伊西國)

이서국 사람들이 신라 제3대왕인 노례왕(弩禮王) 14년인 A.D. 37년에 금성(金城)을 쳤다.

‘삼국사기’ 권2 유례이사금 14년(297)조에는 이서국이 신라를 침공하자 신라는 대병으로 막았으나 이를 물리치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홀연히 기이한 병사(異兵)가 나타나 신라병과 연합해 이를 물리쳤다. 이긴 후에 보니 이병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선왕인 미추왕의 왕릉 죽현릉(竹現陵)에 죽엽(竹葉)이 쌓인 것을 보고는, 선왕이 음덕으로 대나무 잎으로 병사들을 만들어 신라를 도운 것으로 믿었다. ‘삼국유사’ 기이권제일 미추왕 죽엽군조(味鄒王竹葉軍條)에도 비슷한 내용이 전한다. 까닭에 위의 노례왕은 3대 유리왕이 아니라 14대 유례왕인 듯하다. 일연스님께서 없는 자료로 글을 쓰다 보니 애를 많이 먹은 듯하다. 그런데 ‘삼국사기’를 보면 알 수 있는 내용인데 일연스님은 안 본 걸까? 애써 외면한 걸까? ‘삼국유사’에 나오는 ‘삼국사’는 ‘삼국사기’가 아니라 또 다른 ‘구삼국사’일까?

운문사(雲門寺)에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제사납전기(諸寺納田記)가 있다. 이 장부에 “632년에 이서군(伊西郡)의 금오촌(今郚村) 영미사(零味寺)에서 밭을 바쳤다”고 적혀있다. 금오촌은 지금 청도(淸道) 땅이니 청도군(淸道郡)이 바로 옛날의 이서군인 것이다.

주변의 여러 사찰(말사)들이 본사인 운문사를 유지하기 위해 논밭을 바친 내용을 적은 장부인 듯하다. 영미사가 어딘지 잘 모른다. 고고학 발굴조사를 통해서 어딘지 알았으면 좋겠다. 어딘가 논밭으로 뒤덮인 폐사지라도 찾았으면 좋겠다. 어쨌든 이 절에서 바친 논밭에서 키운 곡식으로 공양미를 올리고 그것으로 생활했던 것 같다. 지금 조계종의 일부 권승처럼 축재나 도박에 쓰지는 않았기를 빈다. 적어도 효심이 지극한 국존 일연선사가 머물렀던 절인데 설마 아닐 것이다.

* 이글은 일연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었을 수 있다는 상상에 기반을 둔 재해석이다. ‘삼국유사’ 자체가 일연의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서 재편됐을 것이기에 원문(진한 글자)을 조목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한 것도 있음을 알린다.

dogyeom.h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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