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4 (화)

[하도겸 칼럼] 낙랑국과 대방, 그리고 말갈의 역사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서울=뉴시스】하도겸 박사의 ‘뜻으로 보는 삼국유사’ <5>

낙랑국(樂浪國)

전한(前漢) 때 낙랑군을 설치했는데 한서 지리지에 설명(주)을 단 응소(應邵)는 낙랑군이 ‘고조선국’이라 했다. 고조선의 옛 땅에 낙랑군을 설치했다고 주장하고 싶었나 보다. 죽어도 고조선을 지배했다고 자랑하고 싶은 과시욕은 몇 번이나 패배했던 그들의 열등감의 표현인가? 그래선지 ‘신당서’도 '평양성은 한나라의 낙랑군'이라고 주를 달았다. 당연한 사실이라면 왜 이리 강조하는지 모르겠다. 진정한 회장은 내가 “회장이야” 또는 “내가 전에 네 상사였지!”라고 떠들고 다니진 않는다.

‘국사’에는 'B.C. 28년 낙랑인들이 신라에 항복했다. A.D.27년에는 고구려의 제3대 무휼왕(無恤王)이 낙랑을 멸망시키니 그 나라 사람들은 (북)대방(帶方)과 함께 신라에 투항해 왔다. A.D. 44년 광무제(光武帝)가 낙랑을 공격해 빼앗아 군현으로 삼아, 살수(薩水) 이남의 땅이 한나라에 속하게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상의 문헌들만 보면 낙랑이 평양성이란 게 맞다. 누구는 낙랑의 중두산(中頭山) 부근이 말갈의 경계고, 살수는 지금의 대동강(大洞江)이라고 한다. 결국, 지명이나 경계가 문헌마다 달라서 어느 말이 옳은지 알 수가 없다. 일단 다 모아 남겨 놓겠다. 백제 온조왕(溫祚王)은 '동쪽에 낙랑, 북쪽에 말갈(靺鞨)이 있다'고 했다. 여기서 낙랑은 한(漢)나라 때 낙랑군에 속했던 현(縣)인가?

낙랑이라고 하면 고조선 관련 문헌만 있는 게 아니다. 신라 사람들도 스스로 낙랑이라고 했나 보다. 지금 우리 고려(高麗)에서도 그쪽 출신 부인들을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이라 부른다. 태조(太祖) 왕건이 딸을 김부(金傅)에게 시집보낼 때도 낙랑공주(樂浪公主)라 불렀다는 기사도 있다.

북대방(北帶方)

북대방에 죽담성(竹覃城)이 있었다. A.D. 27년 대방 사람들이 낙랑 사람들과 함께 신라에 항복했다. 낙랑과 대방 둘 다 전한 때 설치한 군(郡)이다. 그 후에 참람되게 나라(國)라고 하더니 이때에 와서 항복했다.

남대방(南帶方)

중국 삼국시대 조조가 세운 위(魏)나라 때 남대방군(지금의 南原府)을 뒀다. 대방의 남쪽에는 천리나 되는 바다 한해(澣海)가 있다. A.D. 196∼219년 사이에 마한 남쪽의 황무지에 대방군을 설치해 드디어 왜(倭)와 한(韓)과 접하게 됐다.

말갈(靺鞨; 혹은 물길勿吉)과 발해(渤海)

'발해는 본래 속말(粟末) 말갈이다. 추장(酋長) (대)조영(祚榮)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진단(震旦)이라고 했다. 712년 말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발해라고만 했다. 719년 (대)조영이 죽자, 그 시호를 고왕(高王)이라 했다. 세자(世子)가 왕위에 오르자 우리 황제(당 현종)가 왕에 책봉했다. 그런데 우리 중국의 연호를 버리고 스스로 인안(仁安)이라는 연호를 만들며 해동(海東)의 큰 나라로 컸다. 5경(京)·15부(府)·62주(州)의 지방행정제도를 뒀다. 926년 거란(契丹)이 발해를 공격해서 이긴 이후로 거란의 지배를 받았다.'고 중국 역사서인 ‘통전(通典)’은 ‘발해’가 ‘당’에게 까불다가 ‘거란’한테 혼났다고 속내를 드러낸다.

'678년 고구려 후예들이 북쪽 태백산(太伯山) 부근에서 발해를 세웠다. 732년 당 현종이 장수를 보내 발해를 공격했다. 734년에는 발해·말갈이 바다를 건너 당나라 등주(登州)를 공격하자 현종은 겨우 막아냈다.'는 ‘삼국사’와 '고구려의 옛 장수 (대)조영이 군사를 모아 태백산 남쪽에서 발해를 세웠다.'는 ‘신라고기(新羅古記)’ 기사들을 일연스님은 용케도 찾아냈다. 그러고는 '여러 문헌을 보면, 발해는 말갈의 별종(別種)으로 이후 갈라지기도 합치기도 해서 서로 좀 다르게 기재되었을 뿐이다.'고 분석했다.

‘지장도(指掌圖)’는 '발해는 만리장성 동북 모퉁이 밖에 있다.'고 했다. 가탐(賈眈)이 지은 ‘군국지’에는 '발해국의 압록 ·남해 ·부여 ·추성 등 4부(府)는 모두 고구려의 옛 땅이었다. 지리지에서 삭주 영현(領縣)으로 지금의 용주(湧州)로 비정되는 신라 천정군에서 추성부에 이르기까지 도합 39역(驛)이 있다'고 했다. ‘삼국사’에는 '백제 멸망 후 발해·말갈·신라가 그 땅을 나눠 가졌다'고 했다. 이들 문헌을 보면 발해는 또 말갈과 갈라져서 다른 나라가 된 것이다.

이외에도 말갈 관련 기사는 더 있다. 신라인들은 '북쪽에는 말갈이 우리 신라 아슬라주(阿瑟羅州)에 접해 있고 남쪽에는 왜인(倭人), 서쪽에는 백제가 있어 우리나라의 해가 되고 있다.'는 기록도 있다. ‘동명기(東明記)’에는 '졸본성(卒本城)은 지금의 동진(東眞)인 말갈에 접해 있다. A.D. 125년 말갈군사들이 신라 북쪽 국경을 대거 넘어와 대령(大嶺)의 성책(城柵)을 습격하고 이하(泥河)를 넘어갔다'는 기록도 있다. ‘후위서(後魏書)’에는 '말갈을 물길(勿吉)'이라고 했으며 ‘지장도’에는 '읍루와 물길이 모두 다 숙신(肅愼)이다'라고 했다. 일단 여기에 다 전하니, 후일 역사가들이 잘 공부해주기를 바란다.

* 이글은 일연 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었을 수 있다는 상상에 기반을 둔 재해석이다. ‘삼국유사’ 자체가 일연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 재편됐을 것이기에 조목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한 것도 있음을 알린다.

dogyeom.ha@gmail.com

<저작권자ⓒ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