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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7 (일)

<허영섭 칼럼> 국무총리 수난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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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히 ‘국무총리 수난시대’라 할 만하다.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 각부를 통할한다”는 권위와 영예는 간데없고 온통 찢겨진 상처뿐이다. 돌고돌아 정홍원 총리로 다시 낙착되었건만 과연 얼마나 힘이 실릴지 내다보기조차 불투명하다. 인사청문회가 열리기도 전에 안대희, 문창극 두 명의 후보자가 연달아 낙마한 데 따른 공황(恐慌) 장애다.

혹시 ‘연임 총리’라고 불러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제대로 신임을 받았다고 간주하기에는 흔쾌하지가 않다.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분을 찾으려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언급이 그것을 말해준다. 국정공백과 국론분열이 깊어진 탓에 더 이상 후임자를 찾지 못하고 고심 끝에 유임을 결정했다는 얘기다.

총리의 위상은 이미 세월호 유가족들에 의해 여실히 드러난 마당이다. ‘만인지상(萬人之上)’의 한 꼬투리라도 권위를 지녔다면 물세례의 봉변은 없었을지 모른다. 결국은 ‘일인지하(一人之下)’일 뿐이라는 명확한 현실 인식에 대한 반응이었다.

이런 수난상은 김대중 정부 시절 장상, 장대환 후보자에 대한 임명동의안 연속 부결 때부터 예고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름대로 이화여대 총장과 신문사 사장을 지낸 명망가들이었지만 위장전입과 부동산 투기 의혹을 넘어서지 못했다. 이쯤이면 ‘총리 서리(署理)’라는 꼬리표가 훈장일 수는 없다. 그나마 ‘대독 총리’로서 마지막 권위에 대한 환상조차 이렇게 무너지게 됐던 것이다.

국무총리 수난의 기록은 정부수립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헌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 박사가 직접 국회에 출석해 이윤영 의원을 총리 후보로 전격 지명하고 동의를 구했으나 인준안은 그날로 부결되고 말았다. 1948년 7월 24일 이 대통령이 중앙청 광장에서 취임식을 가진 뒤 불과 사흘 뒤의 얘기다.

이북 출신으로 해방 직후 월남함으로써 정치적 기반이 취약했던 이윤영을 지명했다는 자체가 논란거리였다. 남북통일에 대비해 그를 초대 총리로 임명하겠다는 것이었지만 김성수의 총리 지명을 바라던 한민당 세력의 반대표를 막을 수는 없었다. 신익희와 조소앙 지지파도 부표(否票)에 가담했다.

초창기부터 총리 자리에 생채기가 났던 것은 이처럼 서로 정치적 계산이 달랐던 계파별 이해관계에 의해서다. 이윤영이 그뒤에도 두 차례나 총리 지명을 받고도 끝내 서리 직함을 벗어나지 못했던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제와 내각제의 어정쩡한 타협에 의해 만들어진 총리 직책은 상처가 아물지도 못한 채 계속 덧날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 협상과 절충에 흔들리기 마련인 총리 위상은 인사청문회가 실시되면서부터 더욱 위협받는 처지가 되었다. 과거 사회적 명망가라는 사실만으로 무난한 자격 조건이었으나 요즘은 업무추진력과 도덕성까지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문회 제도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당사자들의 처신 잘못이고, 그릇된 처신을 용인했던 시대적인 한계다.

문제는 앞으로도 당분간 국민들의 기대 수준에 부응하는 인물을 찾기가 어려울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입장에서 웬만한 지위에 올랐다면 오십보 백보이기 마련이다. 후보자를 고르다가 정 어려우면 정부조직법상의 대행체제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총리제를 선출직으로 바꾸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러나 청문회 때문에 고개를 돌리던 사람들도 서로 잘났다고 나올까봐 지레 걱정이다. 총리의 수난을 바라보며 우리 사회의 현실을 개탄하게 되는 요즘이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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