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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문창극 "조부 문남규, 삭주 검색" vs "증거 없어"…공훈록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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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가 기자회견에서 사퇴를 표명하며 자신이 독립유공자 문남규 선생의 손자라고 주장한 것과 관련, 민족문화연구소가 문 후보자의 주장을 반박하고 나섰다.

문 후보자는 24일 오전 10시 정부 서울청사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총리지명 14일만에 후보직에서 물러난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이 자리에서 "2010년에 애국장이 추서된 문남규 선생이 할아버지다. 저를 친일과 반민족이라고 주장하시는 데 대해 저와 제 가족은 너무나 큰 상처를 받았다"며 "제 가족은 문남규 할아버지가 3·1운동 때 항일운동을 하셨다고 문기석 아버님으로부터 듣고 자랐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민족문제연구소 측의 입장은 문 후보자와 다르다. 민족문화연구소 측은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과 문창극 후보의 할아버지가 동일인이라고 확정할 수 있는 자료는 아무것도 없다"고 반발했다.

또 "현재 발굴된 사료로는 문남규 선생의 출생지를 알 수 없다. 다만 대한독립단 주00 휘하 소대 대원으로 1920년(민국2년) 평안북도 삭주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전사했고, 이 같은 내용이 1921년 4월 9일자 독립신문에 실려 있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국가보훈처 홈페이지의 독립유공자 인물찾기(공훈록)에서 문남규 선생을 검색하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온다.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소속되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다 일본군에게 희생되었다.

대한독립단은 3.1운동을 계기로 보다 효과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보약사(保約社),향약계(鄕約契),농무계(農務契),포수단(砲手團) 등 주로 의병운동 계열의 인사들이 1919년 4월 각 단체를 해산하고 결성하였으며, 복벽주의(復?主義)를 이념으로 하였다. 본부를 류하현 삼원포에 두었으며, 도총재 박장호(朴長浩), 부총재(副總裁) 백삼규(白三圭)였으며, 도총재부 산하에는 사무기구로 총단이 있었는데 총단장에 조맹선(趙孟善), 부단장에 최영호(崔永浩), 김원섭(金元燮)이 활동하였다.

국내외에 모두 100여개소의 지단,지부를 설치하였으며, 만주지역에는 거류동포 100호 이상을 구(區)로 하는 관구(管區)를 두고 10구에 단장을 두어 자치행정실시하였다. 환인(桓仁),장백(長白),무송(撫松),임강(臨江),관전(寬甸),집안(輯安) 등 10개 현에 지단을 세웠다. 이후 1923년까지 국내와 만주지역에서 활발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으며,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거쳐 의군부(義軍府)로 발전하였다.

문남규는 1921년 평북(平北) 삭주(朔州)에서 대한독립단 대원으로 일본군과 전투 중 순국(殉國)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신문(1921. 4. 9)

이소라 기자 wtnsora21@segye.com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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