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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아프간 아이 바시르의 운동회날…한국 친구는 하트 손짓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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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마흐무다의 집에 걸린 한국식 손가락 하트 그림. 마흐무다가 직접 그렸다. 마흐무다는 “우리 아이들이 한국과 아프간 두 나라 모두를 사랑하고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그렸다”고 했다. 배현정 기자


“늦었다고요? 괜찮아요. 지름길로 뛰어가면 되니까요.”



4월30일 오전 8시. 울산 동구 중앙아파트 3동 공동현관 앞에 서 있던 초등학생 이브라를라(8)가 말했다. 친구 오스만(8)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5층 건물 3개 동으로 이뤄진 이 아파트는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인 2022년 2월7일 아프가니스탄 특별기여자 29가족 158명이 정착한 곳이다. 아기를 안은 이브라를라의 엄마가 4층 베란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소리쳤다. “엄마가 학교 늦는다고, 빨리 뛰어가래요.” 이브라를라가 웃으며 말했다.





노옥희 교육감 손잡고 걷던 그 등굣길





5분도 안 돼 등굣길 동무 4명이 다 모였다. 아이들은 아파트 입구 반대편으로 난 지름길로 냅다 뛰기 시작했다. 길이가 30m 정도 되는 가파른 계단길이 보였다. “빨리빨리.” 맏언니 마르와(13)가 아이들을 독려했다. 하지만 뛰는 틈에도 아이들은 장난과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이날 이브라를라와 마르와가 뛰어간 길은 2022년 노옥희 전 울산교육감이 아프간 아이들 손을 꼭 잡고 함께 걸었던 서부초등학교 등굣길이다.



“처음 학교 갈 때는 무섭고 떨렸어요.” 마르와가 말했다. 당시는 한국인 학부모들의 등교 거부 시위가 벌어진 직후였다. 편견은 힘이 셌다. 등교는 허락했어도 한국 아이들과 한 공간에서 생활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아프간 아이들은 원래 등교 시간보다 10분 늦은 아침 8시50분까지 학교로 갔다. 재학생과 마주치지 않게 하려는 학교 쪽 조처였다. 등교 뒤엔 교사 인솔 아래 일반 학급과 구별된 특별반으로 가 수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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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아침 8시께 울산 동구 중앙아파트 지름길로 마르와, 이브라를라 등 아이 4명이 함께 등교하고 있다. 배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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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 등굣길 분위기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아프간 아이들은 한국인 재학생과 섞여 학교 운동장으로 걸어 교실로 간다. 아이들이 공부하는 교실도 더 이상 특별학급이 아니다. 정착 첫해인 2022년 서부초 특별반인 ‘한아름’에서 따로 수업을 받던 아이들 28명은 지난해부터 모두 일반 학급 소속이 됐다.





방과 후엔 공부방 모여 국어·수학 공부





오전 9시50분. 운지관 2층에 마련된 4평 남짓한 ‘한국어학급2’ 교실에서 이브라를라와 오스만 등 1학년생 4명의 한국어 수업이 시작됐다. 서부초에 입학한 아프간 어린이 23명 가운데 12명은 따로 편성한 한국어 수업을 일주일에 최대 10시간씩 듣고 있다. 이 수업 과정을 마친 아프간 어린이는 모두 10명이다. 지난해는 7명이 한국어능력을 평가하는 서부초 한국어학급 운영위원회 심사를 거쳐 일반 교과 과정만 듣게 됐다.



이날 아이들은 단어에 알맞은 모음을 채워넣는 연습을 했다. 강사 손지영(35)씨가 “아프간에서 야자수 봤어요? 기억나요?”라고 물었다.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저었다. “야자수의 ‘야’에 들어갈 모음은 뭘까요?” ‘여자수’라고 쓴 이브라를라가 살림의 답안지를 곁눈질하더니 재빠르게 ‘ㅕ’ 모음을 지우개로 지우고 ‘ㅑ’로 고쳐 썼다.



학교 수업을 마친 아이들은 중앙아파트 106호로 모였다. 울산 동구 가족센터가 운영하는 공부방이다. 강사 서진선(44)씨가 아프간 어린이 8명에게 국어와 수학 문제를 풀이해줬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지만, 공부방은 한국어를 공부하는 아이들로 열기가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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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라를라와 살림 등 아프간 아이 4명이 한국어 수업을 듣고 있다. 둘이서 답안지에 쓴 모음을 두고 옥신각신하고 있다. 배현정 기자


이튿날인 5월1일 오전 10시50분. 서부초에서 체육대회가 열렸다. 이날 아이들의 관심은 온통 2학년 3반과 4반의 이어달리기 경주에 집중돼 있었다. 4반 대표로 뽑힌 바시르(9)가 빨간 바통을 손에 쥐고 출발선 앞에 섰다. “땅!” 바시르가 달리기 시작했다. “시르! 시르!” 4반 아이들이 그의 별칭을 한목소리로 외쳤다. 한바퀴를 전력 다해 뛴 바시르가 교대 지점에 먼저 들어와 바통을 다음 주자에게 넘겼다. 단짝 김아무개(9)군이 바시르를 향해 두손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화이트칼라 출신에겐 여전히 어려운 육체노동





어른들의 하루는 아이들보다 한 시간 일찍 시작했다. 아침 7시가 되자 현대중공업 남색 작업복을 입은 아프간 특별기여자들이 하나둘 중앙아파트 앞마당으로 나왔다. 8명이 다 모인 것을 확인한 샤피쿨라(52)가 “갑시다” 하자, 남자들이 현대중공업 사내 식당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프간에서 치과의사로 일했던 샤피쿨라는 서툰 한국어로 “일 어렵고 힘들어요. 몸 아픈데 파스 붙여도 효과 없어요”라고 했다. 이들을 포함한 아프간 기여자 23명은 현대중공업 협력업체 11곳에 흩어져 일한다. 정부가 주선한 일자리다. 정착 첫해엔 29명이 공장에서 일했다. 지금은 6명이 제약업체, 컴퓨터업체로 이직했거나 외국어 강사로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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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아침 7시 울산 동구 중앙아파트 앞마당에 모인 샤피쿨라 등 아프간 가장 8명이 출근에 앞서 아침 간편식을 먹기 위해 현대중공업 사내 식당으로 걸어가고 있다. 배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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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직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지금껏 그들이 살아온 이력이 공장 노동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29명 중 15명은 아프간 바그람 한국병원에서 의사, 간호사, 약사로 일했다. 12명은 통역과 회계 일을 했다. 이들을 위해 동구 가족센터에서 ‘재활운동 프로그램’ 수업을 두차례 열기도 했다. 이정숙 센터장은 “대부분 아프간에서 육체노동을 안 해봐서 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어려움을 많이 토로한다”고 했다.



오전 11시, 가족센터에선 아프간 여성들을 상대로 한국어 수업이 한창이었다. 중급반에서는 인터넷 쇼핑을 소재로 한 수업이 이어졌다. 물건을 살 때 사용하는 서술어에 대해 설명이 이어지던 중 마흐무다(26)가 손을 들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사려고 해요’는 의지가 약한 표현인가요?” 강사 박철용(47)씨가 구글 번역기를 대형 화면에 띄워두고 질문에 대해 설명해줬다.





“변호사의 꿈, 한국서도 이룰 수 있을까요?”





수업이 끝나자 마흐무다는 서둘러 2층에 있는 공동육아나눔터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생후 7개월 된 아기를 돌보고 있던 박순남(74)씨가 말했다. “왔어? 애기 배고파서 울었어.” 마흐무다는 나눔터 안쪽 방으로 급히 아기를 안고 들어가 수유를 했다. 마흐무다와 같이 울산 동구에서 아기를 출산한 아프간 여성은 모두 9명이다.



낮 12시10분. 포대기로 아기를 감싼 마흐무다가 센터 앞 버스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익숙한 듯 106번 시내버스에 올라 교통카드를 찍고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마흐무다는 “작년까지는 실수로 다른 버스를 타서 기사님한테 ‘내려주세요’라고 자주 말했다. 이제는 안 그런다”고 멋쩍게 웃었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 마흐무다를 향해 동네 과일가게 주인 김삼수(67)씨가 인사를 건넸다. “아프간 새댁, 요즘 참외 맛있어. 값도 싸.” 마흐무다가 “잘 지내셨죠?”라고 웃으며 답했다. 정착 초기 현금 사용이 어렵고 밖으로 나가는 게 두려웠던 아프간인들은 근처 파키스탄 마트가 아파트 공터에서 매주 1번씩 열던 이동매장에서 장을 봤다. 이제는 동네시장과 대형마트는 물론 인터넷 쇼핑몰을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장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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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낮 12시10분께 한국어 수업이 끝난 마흐무다가 아기를 아기띠로 안은 채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올라탔다. 아프간 친구와 차창 밖으로 보이는 이팝나무를 가리키며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다. 배현정 기자


아프간에서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마흐무다의 꿈은 변호사였다. 탈레반의 압제를 피해 한국에 정착했지만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는 막막하기만 하다. “저, 한국에서 변호사 될 수 있을까요?” 마흐무다가 한국어 숙제 노트를 덮으며 물었다.





남편 월급만으론 빠듯…“돈 벌고 싶어요”





마흐무다가 지난해 10월 출산 뒤 몸을 추스르자마자 한국어 수업을 받으러 나온 이유도 취업이었다. 마흐무다는 “남편 월급이 아프간에 있을 때보다 많이 줄었다. 나도 돈 벌고 싶다. 그래서 아프간에 있는 가족들을 한국에 데려오고 싶다”고 했다.



오후 1시50분. 마흐무다의 집을 나서려는데, 주방 벽에 붙은 가로 30㎝ 세로 20㎝ 크기의 가족사진이 눈에 띄었다. 신혼 시절 친정·시댁 식구 20여명이 모여 찍은 사진이었다. “탈출할 때 가방에 꼭꼭 숨겨 가져온 거예요. 혹시라도 일이 잘못돼 탈레반에 붙들리면 가족들 전부가 해를 입을 수 있었거든요.” 마흐무다의 사슴처럼 큰 눈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펑펑 쏟아낼 것 같았다.



배현정 기자 spr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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