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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글로벌포커스]워크 자본주의 ‘역풍’…DEI 손절하는 美기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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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과 성의 다양성·형평성·포용성 추구

'적극적 우대 조치' 위헌 판결로 반발 증폭

빌 애크먼·머스크 등 재계 거물들 DEI 비난

텍사스 등 8개 주, DEI 배척 법제화 나서

11월 미국 대선서 이념 대립 격화 전망

수십년간 미국의 입시부터 고용에 이르기까지 인종, 성별의 다양성을 추구해온 ‘DEI’ 정책이 최근 역풍을 맞고 있다. 기업들의 연례 보고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다양성’ 문구는 자취를 감추고 있고, 보수 진영에선 DEI 정책을 확대한 기업들을 고소하는 '안티 워크 운동'마저 벌어지고 있다. DEI를 둘러싼 반감이 오는 11월 미국 대선에서 보수와 진보의 정치적 이념 대립으로 비화할 것이란 전망도 잇따른다.

역풍 맞은 '워크 자본주의' 뭐기에
최근 미국 내에서 역풍을 맞은 ‘워크(Woke·깨어 있는) 자본주의’는 인종·성별 등 사회적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는 기업들의 경영 방식을 일컫는 용어다. DEI 정책은 바로 이 워크 자본주의의 대표적 사례다. DEI란 다양성(Diversity), 형평성(Equity), 포용성(Inclusion)의 약자로 정부와 대학교는 물론 기업들이 채용, 보상에 있어서 인종과 성별의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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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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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CNN 등 현지 언론은 2016년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백악관 입성과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을 미국 내 정부, 대학교 외에 기업 경영 트렌드에까지 DEI가 적극적으로 반영되기 시작한 기폭제로 평가한다. 구인 플랫폼 인디드에 따르면 미국의 다양성 및 포용성 전문가 채용 공고는 2016~2017년 35% 증가했다.

기업들 사이에서 DEI 관련 비전 선포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글로벌 커피 체인 스타벅스는 2025년까지 직원의 30%를 흑인·원주민·유색인종으로 구성한다는 다양성 비전을 내세웠다. 미디어 통신 업체 컴캐스트는 흑인·원주민·유색인종·여성이 51% 이상 지분을 가진 소규모 기업에만 보조금을 지급하는 정책을 수립했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 아마존은 흑인 및 라틴계 배송업자 계약 시 커미션 1만달러를 추가 지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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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워크의 서막 : 대입 시 ‘적극적 우대조치’ 위헌 결정
이 가운데 미국의 사회적 기조로 자리 잡은 DEI에 대한 반발도 커져 갔다. 특히 지난해 6월 미국 연방대법원이 대학교 입학과 기업의 고용 과정에서 소수 인종에 특혜를 주는 ‘적극적 우대조치(Affirmative action)’에 위헌 결정을 내린 것이 주요 변수가 됐다. 소수 인종이나 특정 성을 우대하는 정책을 연례보고서에 명시할 경우 도리어 역차별 소송을 당할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재계 거물들의 DEI 비판 목소리도 위세를 더해갔다. 오랜 민주당 지지자이자 ESG 후원자로도 알려진 빌 애크먼 퍼싱스퀘어캐피털 회장은 지난 2월 워싱턴포스트(WP)와의 인터뷰에서 “DEI 운동의 위선이 드러났다”며 “ESG, 그중에서도 DEI를 향한 경주가 자유시장경제 시스템을 이끄는 능력주의의 가치를 훼손하고 우리를 옥죄고 있다”고 비판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도 애크먼 회장 지원 사격에 나섰다. 그는 “DEI는 인종차별의 다른 말일뿐”이라며 “DEI는 인종, 성별, 기타 여러 요인에 기초해 사람을 차별하는 비도덕적 단어”라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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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트렌드에서 기업 리스크로 전락한 DEI
앞서 DEI 정책을 선도적으로 도입했던 스타벅스와 컴캐스트, 아마존 등의 기업들은 차례로 소송에 직면하며 DEI 역풍의 희생양이 됐다. 이를 본 다른 미국 기업들이 빠른 DEI 손절에 들어간 것은 물론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미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된 수십 개 기업의 2023 연례보고서(K-10)를 분석한 결과 이들 보고서에서 DEI 관련 문구와 목표들이 대거 수정·삭제된 것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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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백화점 체인 콜스는 지난 3년간 “다양한 리더(Diverse leaders)를 발굴하겠다”는 목표를 천명해 왔지만, 최근 연례 보고서에서 ‘다양한’ 문구를 삭제했다. 경쟁사 노드스트롬도 흑인 및 라틴계가 소유·운영·디자인한 브랜드에서 5억달러 상당의 매출을 올리고 관리자 직책의 50%를 이들 인종에게 할당하겠다는 목표를 없앴다. 세일즈포스는 직원의 50%를 소외 계층 출신으로 채용하고 전체 직원의 40%를 여성 또는 논 바이너리로 구성하겠다고 공표했으나, 지난해 연례 보고서에선 이 같은 비전이 자취를 감췄다. 이 외에도 우버, 웰스파고, 씨티은행 등의 기업이 ‘인종차별적 관행 철폐’ 목표를 수정하거나 삭제했다. 줌, 스냅, 메타플랫폼, 테슬라, 엑스처럼 DEI 인력 및 팀을 해고·해체하는 기업도 생겨났다.

톰 린 템플대 비슬리 법과대학 교수는 “기업들이 DEI에 관한 정치적 환경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며 “DEI 정책 폐지를 거부하면 고소당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질 피시 펜실베이니아대 로스쿨 경영법 교수는 “일부 미국 기업들은 자신들의 DEI 자격을 홍보하거나 사회 문제에 대해 공개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더는 감수할 만한 가치가 없는 위험이라고 판단하고 있다”며 “자신을 스스로 ‘반인종차별주의 회사’라고 표현하는 것은 단점만 있는 정치적 행위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공공 부문까지 번진 DEI 역풍
민간 영역을 강타한 DEI 역풍은 공공부문까지 번져나가는 모습이다. 지난달 NBC 뉴스 분석에 따르면 현재 미국 30개 이상의 주에서 공화당 의원들에 의해 발의되거나 가결된 DEI 규제 법안은 100개를 넘어섰다. 텍사스를 비롯한 유타, 노스다코타, 노스캐롤라이나 등 미국 내 보수성향이 짙은 주들이 주축이 돼 DEI 축출 법제화에 나선 것이다.

이에 따라 텍사스의 공공기관들은 소수인종을 우대하거나 다양성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채용 특혜를 제공할 수 없게 됐다. 텍사스주립대의 경우 교내에 설치된 다문화 센터를 폐쇄하고, 졸업식 행사에서 흑인이나 히스패닉, 아시아계 학생들을 위한 별도의 이벤트에 자금을 지원하는 것도 중단했다. 유타 주는 각종 공공 프로그램에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과 같은 단어의 사용을 제한했다. 또한 능력에 기반한 평가 방식을 인종차별이나 성차별로 치부하는 것도 금기시하고 있다.
보수 vs 진보 이념 대립
DEI를 둘러싼 논쟁은 오는 11월 미국 대선에서 보수와 진보의 정치적 이념 대립으로 비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올해 백악관 재입성을 노리는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달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미국에는 용인할 수 없는 백인에 대한 반감이 존재한다”며 “불공평한 법과 교육이 백인에 대한 역차별 문제를 낳고 있다”고 주장했다.

뉴욕타임스, CNN 등 현지 언론들은 DEI가 초래한 미국의 이념적 갈등을 집중 조명했다. 뉴욕타임스는 “미국이 DEI 역풍의 공격을 받고 있다(America Is Under Attack)”고 보도했고, CNN은 “DEI가 미국을 분열시키고 있다(DEI is dividing America)”고 진단했다. 라이언 윌리엄스 클레어몬트 연구소장은 “DEI가 미국 사회를 ‘억압자’와 ‘억압받는 자’로 양분하고 있다”며 “이 같은 담론은 미국의 분쟁과 분열을 초래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진영 기자 camp@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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