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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목)

[김미월의쉼표] 기억은 어디로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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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책상 서랍 깊숙한 곳을 뒤지다가 흰 종이로 싸인 얇은 책 한 권을 발견했다. 펼쳐보았더니 오래전 세상을 떠난 후배의 유고 시집이었다. 그랬다. 표지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파서 보지 않으려고 종이로 싸두었었다. 그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책을 아예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었다.

방바닥에 주저앉아 시집을 펼친다. 깊은 밤이고 사방이 고요하고 정신도 맑지만 나는 시에 집중하지 못한다. 한 줄 읽고 후배의 얼굴을, 다시 한 줄 읽고 그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페이지를 넘긴다. 팔인용 방. 제목을 보자마자 나는 순식간에 저 까마득한 어느 날 후배와 마주 앉았던 밥집에 가 있다. 누나, 내가 어제 고시원에 방 보러 갔었는데 말이야. 보통 고시원은 다 일인실이잖아. 근데 어제 총무가 보여준 방은 글쎄 팔인실인 거야. 이층 침대가 네 개 있는데 거기 일곱 명이 누워 있더라고. 문이 열리자마자 그 일곱 명이 나를 노려보는데…… 어휴, 나 그거 시로 쓸 거야. 후배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시를 읊조린다. 나는 괜한 참견을 한다. 일곱 명이 나를 본다, 말고 열네 개의 눈동자가 나를 본다, 이게 낫지 않을까? 후배가 웃는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텐데. 아니, 어서 밥부터 먹으라고 할 텐데.

후배가 떠난 지 이십 년이 되어간다. 사실 나는 학창 시절 그와 딱히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어쨌든 생전에 절친하지도 않았고 그가 떠난 후 긴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그에 대한 기억은 이토록 크고 깊고 가까워 나를 아프게 한다. 사람은 얼마만큼의 기억을 품을 수 있는가. 그것의 유통기한은 얼마나 되는가.

문득 후배는 어떤 기억을 품고 있었을지 궁금해진다. 세상에 대해, 사람들에 대해, 자신에 대해. 일생 동안 그가 품었던 기억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내가 품고 있는 기억은 어디로 갈까, 내가 죽으면. 셰익스피어는 물었다. 눈이 녹으면 그 흰빛은 어디로 가는가? Where goes the white when the snow melts? 이 서글프고도 아름다운 문장이 실제 셰익스피어의 것인지 아닌지는 명확하게 밝혀진 바 없다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닌데.

후배가 그립고 미안하고 추운 밤, 나는 흰 종이에 싸인 책을 도로 서랍에 넣는다.

김미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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