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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목)

바보 클럽을 하나 만들자 [삶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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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성북동소행성 대문. 편성준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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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동네 골목골목을 할 일 없이 산책하던 아내는 사람이 살고 있는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빈 한옥을 하나 발견한다. 대문 틈 사이로 들여다보니 비록 빈집이지만 형태가 온전해서 조금 고치기만 하면 들어가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동산중개업소에 가서 물어보니 6개월 전부터 집이 비어 있는 상태라 언제든지 구입이 가능하다고 했다. 마침 3년간의 성북동 꼭대기 단독주택 생활에 진력이 나 있던 아내는 아무 생각이 없는 남편 편성준을 이끌고 부동산중개소로 가서 덜컥 계약을 해버렸다. 졸지에 한옥을 구입하기로 한 것이다. 갑자기 집이 팔리자 집주인도 황당한 표정이었다. 계약서에 도장을 다 찍은 부동산 사장님이 지나가는 말처럼 "참,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내놨나요?" 하고 물었다. 화들짝 놀란 우리가 아니라고 대답하자 사장님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보통 새집을 사기 전에 살던 집부터 내놓는 건데." 우리는 그때서야 살던 집을 팔겠다고 부동산에 내놓았는데, 기적이 일어났다. 4시간 만에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우리는 한옥 목수님과 함께 두 달간 대대적인 수리를 한 뒤 한옥집으로 들어왔다.

'성북동소행성'이라 이름 붙인 한옥은 인기가 좋았다. 놀러 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저도 한옥집에서 살아 보는 게 로망이에요"라고 말했다. 한옥 마루엔 소파 대신 커다란 탁자와 의자들이 있어 모여 술 마시기 좋았고 책꽂이의 책들은 언제든 대출이 가능했다. 빌려간 책을 돌려주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서 기둥에 '도서대출장부'를 만들어 걸어 놓기도 했다. 여기서 책 쓰기 워크숍도 하고 '독하다 토요일' 같은 독서모임, '소금책(소행성에서 금요일 저녁에 열리는 책 수다)' 같은 북 토크도 열었다. 신문사나 유튜브 인터뷰를 했고 'EBS 건축탐구 집'에도 출연했다.
한국일보

성북동소행성 바깥 화단. 편성준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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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시간들이었다. 4년이 지나자 아내는 슬슬 진력을 내기 시작했다. 한옥을 팔고 다른 데 가서 살아보자는 것이다. 서울엔 작은 거처만 마련하고 가까운 지방으로 내려가 자리를 잡은 뒤 온·오프를 병행하는 삶을 꿈꾸었다. 남편도 회사를 다니지 않고 글쓰기나 강연도 온라인으로 하면 되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부동산중개센터와 온라인에 한옥을 내놓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가격이 맞지 않는다며 고개를 저었다. 공동주택이 78%에 이르고 63% 인구가 아파트에 사는 나라에서 단독주택은 재산가치가 높지 않았다. '한옥에서 살아보는 게 로망'이라던 사람들은 꼬리를 내렸고 구경 삼아 와 보는 사람들이 늘었다. 골목에 있는 한옥이라 당연히 주차장이 없다는 사전 안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참을 둘러보고는 "주차장은 없나요? 우리는 차가 세 댄데"라고 자랑하는 이도 있었다.

조건을 전세로 바꾸었다. 구입자를 찾기 힘든 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한옥을 그대로 팔아버리는 게 아까웠다. 전세금을 낮춰서라도 우리 마음처럼 이 집을 아끼며 살아줄 사람들을 구하자 마음먹었더니 바로 마음에 드는 분들이 딱 나타났다. 사대문 안에 있는 직장에 다니는 젊은 신혼부부였는데 집을 보자마자 너무 좋아했다. 유튜브로 먼저 보고 왔는데도 막상 직접 보니 너무 좋다는 것이었다.

사실 한옥으로 오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너무 반가웠다. 아파트만 집이 아니다, 집은 자산이 아니라 사는 곳이다, 라는 생각을 하는 바보들을 만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생각해 보니 나는 대통령도 별명이 바보인 사람을 제일 좋아했다. 바보 클럽을 하나 만들어야겠다.
한국일보

편성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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