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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세상읽기] 뉴딜과 선거 / 전병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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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전병유 l 한신대 경제학 교수

선거라는 밥상에서 의제와 정책은 건강 챙기려는 맛없는 반찬 정도다. 그럼에도 이번 총선은 심하다. 더불어민주당 1호 공약 무료 와이파이와 자유한국당 1호 공약 재정건전화는 한가하고 심심하다. 불평등, 기후변화, 장기침체에 대응하는 시대적 공약은 없다. 대선 정국이 시작된 미국도 심심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시대적 의제가 없진 않다. 여기서 정책과 의제의 수입오퍼상 역할을 해보자.

자산 불평등. 피케티와 스티글리츠는 부유세 강화와 드라마틱한 증세 주장을 더 역설하고 있다. 최근 불평등 이슈는 소득보다는 자산, 자산 중에서도 부동산, 부동산 중에서도 주택 자산에 집중되고 있다.

주택 자산 불평등은 경제의 역동성 상실 및 금융시장의 불확실성과 높은 상관관계를 가지며 공정과 정의의 문제를 초래한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가 자기를 위해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정치적 포퓰리즘에 귀의한다. 주택 가격이 정체된 지역에서 트럼프와 보리스 존슨에 대한 지지도가 높다. 더욱이 이 시대의 주택 자산은 ‘세대 지대’(Generation Rent, 특정 세대라는 이유만으로 이득을 보는 것)까지 가진다. 베이비붐 세대의 주택 자산 가치가 커질수록 밀레니얼 세대 주택 구입은 더 어려워진다. 대도시 주택 수요는 증가하는데 선진국의 주택 공급은 1960~70년대의 절반 수준이다. 생산적인 대도시에서의 주택 부족은 성장과 생산성, 일자리와 임금에 부정적이다. ‘25조달러 투입으로 1천만채 주택 공급’이 샌더스 정책 공약의 앞자리를 차지한 이유다.

둘째, 그린뉴딜.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행동과 운동은 정치브랜드로 발전하고 있다. 지구 생태에 관한 새로운 사회적 합의가 정책 실행 프로그램으로 구체화하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기존 시스템의 패러다임 전환, 인프라 투자와 일자리 창출, 그리고 사회 정의와 연계되어 정치브랜드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그린뉴딜은 땅을 파는 대신 나무를 심자는 에코-케인스주의 뉴딜이자 물, 교통, 주택, 환경, 그리고 건강을 위한 자금 조달을 민간에 이양했던 시스템을 정부로 전환하자는 뉴딜이며 인종, 소득, 지역 간의 불평등을 없애 모두가 건강하게 살자는 사회 정의를 위한 뉴딜이다. 샌더스는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전력 100%의 목표뿐만 아니라 노후 건물과 버려진 땅의 녹색화로 일자리를 창출하여 저소득 노동자를 중산층으로 만들자는 공약, 그리고 보편적 의료로 건강에서의 사회 정의를 구현하자는 공약을 제시하고 있다.

셋째, 혁신뉴딜. 국가는 시장의 실패를 교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장을 창출해야 한다. 매사추세츠공대(MIT) 그루버와 존슨의 ‘미국 시동걸기’(Jump Start America)는 이를 잘 보여준다. 아이티(IT), 생명공학, 에너지 등에 대한 정부의 공적인 연구개발투자로 국가의 장기적 성장과 생산성을 주도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정부 지원으로 달성된 혁신의 성과가 공유되지 않고 민간기업이 독점하거나 특정 지역에 집중될 경우 정치적 포퓰리즘이 나타난다. 미국의 경우 실리콘밸리, 보스턴, 시애틀, 오스틴 등 상위 10개 도시가 혁신의 70% 이상을 차지한다. 여기서 배제된 지역의 주민들은 쉽게 포퓰리즘에 포섭된다. 혁신기업이 집중된 대도시에 살면서 글로벌 경제를 기회로 파악하는 사람들과 배제된 지역에서 글로벌 경제를 위협으로 보는 사람들 사이에 균열이 발생한다.

이들은 새로운 혁신 허브의 창출로 혁신 성과를 전국적으로 확산할 것을 제안한다. 기술허브지수(Technology Hub Index)를 만들어 혁신지역 선정 시뮬레이션도 하고 있다.

이들은 혁신 성과에 대한 지분 참여 방안도 제시한다. 국가는 혁신지원금에 대한 지분을 소유하고 납세자들은 혁신투자배당을 받는 것이다. 국가가 지원한 스타트업이 성과를 모두 가져가고 납세자에게는 손실을 넘기는 오래된 경제 모델을 벗어나는 것이다.

새로운 사회적 계약은 전통적인 이해 계층과 충돌할 수 있다. 대도시 전문직 중산층, 지역의 전통 제조업 노동 계층, 그리고 대도시의 플랫폼노동자나 특수고용노동자들은 뉴딜에 다른 이해관계를 가질 수 있다. 이들 사이에서 중간의 길을 취하려는 중도 정당의 정치는 아무도 만족시키지 못한 채 포퓰리즘에 패배할 수도 있다. 새로운 사회적 교환과 합의, 즉 뉴딜은 정치다. 선거는 이러한 뉴딜을 위한 정치의 중요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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