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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김광일의 입] ‘환멸(幻滅)’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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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멸(輕蔑)’이라는 말이 있다. 상대를 깔보아 업신여기는 것을 뜻한다. ‘모멸(侮蔑)’이라는 말도 있다. 이것 역시 비슷한 뜻이다. 다만 ‘모멸감’ 또는 ‘자기모멸’ 같은 말로 확장되어 쓰이기도 한다. 같은 ‘멸’자 발음이지만 한자는 다른 또 다른 말에 ‘환멸(幻滅)’이 있다. 환멸. 상대에게 걸었던 꿈이나 기대가 깨져버려서 괴롭고 속절없는 마음이 되었을 때 우리는 환멸이란 말을 쓴다. 환멸.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다가 이 단어가 제목으로 뽑혀 있어서 눈길이 갔다. 청년 정당인 ‘브랜드 뉴 파티’의 서른두 살 조성은 대표가 그 말을 했다. 조성은 대표는 원래 박원순 서울 시장 캠프에서 일하며 정치에 발을 들였고, 이후에도 줄곧 진보 진영 쪽에 몸담고 있었다. 그러다 이번에 자유보수 쪽 미래통합당에 합류한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조성은 대표는 "진보 진영에 환멸을 느낀다"고 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이 같은 젊은이를 진보에서 자유보수 쪽으로 돌려세웠을까. 조 대표는 ‘조국 사태’, ‘문재인 정권의 실정(失政)’, ‘공수처법 강압 통과’, ‘민주당만 빼고’ 칼럼 고발사태 등을 거론했다.

우선 조국 사태부터 본다면 지금 여당은 조국 프레임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정치 집단이라면 행여 야당에서 조국 사태를 물고 늘어질까 봐 걱정을 할 텐데, 지금 여당은 조국 씨를 비판하는 소신 발언을 했던 금태섭 의원의 지역구에 조국 씨를 옹호해온 친문(親文) 성향의 김남국 변호사를 내세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람은 "검찰의 조국 죽이기 실체를 밝히겠다"면서 친문 인사들이 추진 중인 ‘조국 백서’의 필자다. 여당은 총선에 씌워진 ‘조국 프레임’을 경계하고 멀리하기는커녕 자발적으로 ‘반(反)조국 대(對) 친(親)조국’이라는 프레임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 조선일보 사설이 규정한 것처럼 "조국은 희대의 파렴치한 인물"이다. 그런데 조성은 대표의 말대로 "민주당 등 진보 진영은 조국 전 장관을 비판하는 논평 하나 제대로 못 내는" 모습으로 일관했다. 젊은 층은 그런 진보 진영에 두 번의 환멸을 느끼는 것이다. 한번은 조국 일가족의 파렴치한 행동에 대해서, 또 한 번은 그런 조국씨에게 제대로 비판 한 번 못하는 진보 진영의 이중성에 대해 환멸을 느끼는 것이다.

‘민주당만 빼고’라는 임미리 교수의 칼럼에 대한 고발 사태도 마찬가지다. 이인영 원내대표는 어제 국회 연설 때 "송구스럽다"며 공식 사과를 했지만, 고발장에 이름을 쓰고 직인을 찍은 이해찬 대표는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던 정권이 정작 자신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시도했다는 사실에 젊은이들이 환멸을 느꼈을 것이고, 고발장의 장본인이자 당 대표가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환멸을 느꼈을 것이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뒤늦게 임 교수 칼럼에 대해 "저질 칼럼" "함량 미달"이라고 한 것도 진보 진영에 대한 환멸을 깊게 했을 것이다.

충남 아산시장을 찾은 문 대통령에게 "거지 같다. 장사가 안된다"고 했다가 친문(親文) 극성 지지층인 ‘문빠’들에게 신상털이를 당하고 있는 반찬가게 주인을 보면서 진보 진영에 대한 젊은이들의 환멸은 분노하는 마음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대통령에게 사는 게 힘들다는 말도 못 하는 나라냐"고 하면서 이런 풍경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이 이 가게를 자발적으로 찾아주어 오전에 만든 반찬과 음식이 오후에 모두 다 팔려나갔다고 한다. 우리는 이 가게로 ‘환멸의 발걸음’이 이어졌던 것이라고 본다.

오늘 아침 여러 신문에는 추미애 법무장관과 김오수 법무차관이 서울소년원 소년범 세 명에게 세배를 받는 모습이 일제히 실렸다. ‘엄마 장관’ ‘아빠 차관’을 자처한 두 사람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면서 세배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미성년 재소자는 인권도 없단 말이냐" "그 아이들이 왜 공무원에게 세배를 해야 하느냐"는 질책이 빗발쳤다. "이 정권 사람들이 워낙 이벤트와 쇼를 좋아하는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반응도 있었다. 이 세배 사진을 보고 환멸을 느낀 사람이 어디 한둘이었을까.

선거에서는 ‘어느 쪽 정당이 얼마나 잘 하느냐’, 이것보다는 ‘어느 쪽 정당이 자멸(自滅)의 길로 가느냐’에 승패가 갈리는 경우가 많다. 2016년 지난 20대 총선 때 지지율에서 거의 더블 스코어로 야당을 누르고 있던 집권 새누리당이 공천 파동을 겪으면서 자멸의 길로 갔던 것이 좋은 예다. 이번 총선에서 만약 야당이 큰 승리를 거둔다면 그것은 "민주당의 오만과 문빠들의 이성 상실"(심재철 의원)이라고 표현되는 자멸의 길로 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진보 진영 내부에서 그 진보 진영에 ‘환멸’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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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김광일 논설위원이 단독으로 진행하는 유튜브 ‘김광일의 입’, 상단 화면을 눌러 감상하십시오.

[김광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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