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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양성희의 시시각각] ‘기생충’에 기생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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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마케팅에 여념없는 정치권

지자체도 관광효과 노리며 가세

영화의 메시지 자체를 고민할 때

중앙일보

양성희 논설위원


‘국뽕’이란 단어를 싫어하지만 이럴 땐 ‘국뽕’ 한 사발을 마시는 게 인지상정이다.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에 ‘기생충’이 불리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오래전 ‘타이타닉’으로 11개의 트로피를 거머쥔 제임스 캐머런이 “내가 세상의 왕”이라며 포효했던 바로 그 자리다. 그 자리에서 봉준호는 함께 수상 후보에 오른 “위대한 마틴 스코세이지”에게 경의를 표했다. 겸손한 수상 소감에 팬들이 더욱 열광했다. ‘봉하이브’라고 불리는 봉 감독의 해외 팬덤은, 아카데미 이후 더욱 증폭되는 느낌이다. 작품만큼이나 빼어난 언변·유머 감각·인간미 덕이다.

‘기생충’의 성취는 뻗어 나가는 한국 문화의 힘뿐 아니라 오랜 서구 중심성이 흔들리는 세계 대중문화 산업의 판도 변화를 보여줬다. 국내에서는 한창 ‘기득권 꼰대’로 몰매 맞던 386의 명예 회복도 해줬다. 특유의 현실 비판 의식에 새로운 제작어법으로 세계의 인정까지 끌어낸 386 감독들의 존재를 웅변했다. ‘기생충’의 투자·배급사인 CJ로 상징되는 대기업의 공로도 다시 주목받았다.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 소감을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이 한 것에 뒷말이 있지만, 자격은 충분하다. 대기업·대자본 없는 ‘기생충’은 없다.

‘기생충’이 뜨고 나니 숟가락 얹는 이가 많다. 서울시는 아현동 수퍼, 노량진 피자집 등 촬영지 네 곳을 엮는 ‘기생충 팸투어’ 안을 내놨다. ‘괴물’ ‘살인의 추억’ 등 봉준호의 다른 영화 촬영 현장을 돌아보는 ‘봉보야지(bong voyage)’ 투어 개발도 추진한다. 극 중 반지하 집과 동네, 부잣집 세트장이 있었던 고양시와 전주시는 철거한 세트장을 재건립해 관광 코스로 개발한다. 모두 한류 관광 효과를 노린다. 정치권에선 총선 출마 예비후보 사이에 봉준호 공약이 난무한다. 봉준호의 고향인 대구에 ‘봉준호 영화박물관’ 건립을 필두로 ‘봉준호 카페거리’ ‘봉준호 생가터 조성’ ‘봉준호 동상’ ‘기생충 조형물 설치’ 등 멀미 날 정도다.

미국 뉴욕 브롱크스에는 ‘조커 계단’이 있다. 이번 아카데미에서 남우주연상을 차지한 ‘조커’에 나온 후 팬들이 순례하는 명소가 됐다. 인적 드문 우범지대가 모처럼 활력을 찾았지만, 주민들의 피로감이라는 부작용도 커졌다. 곳곳에 ‘촬영금지’ 팻말이 나붙고, 관광객을 향해 주민이 날계란을 던지는 일도 벌어졌다. 관광객이 늘면서 지역경제는 살아나지만 주민이 피해를 보는 ‘오버 투어리즘(과잉관광)’의 한 사례다. 팬들이 자발적으로 몰려드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관이 나설 땐 더욱 정교해야 하는 이유다. 빈부 격차를 비판한 영화 속 빈곤의 현장을 볼거리로 전락시킨다는 비판도 나온다. 해외에도 드라마·영화 촬영지 관광 프로그램은 있지만, 이처럼 정치인·지자체가 경쟁하듯 앞장서는 풍경은 다분히 한국적이다.

알려진 대로 봉 감독은 과거 보수 정권 시절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올랐었다. 자유한국당은 봉준호 박물관 건립 이전에 아직도 자신들의 정치적 부진을 ‘좌파 소굴 충무로’ 탓으로만 돌리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대통령과 여당은 쾌거를 상찬하며 문화예술인 복지 공약을 내놓았지만, 극장을 빠져나오고서도 잔상이 한참 가는 영화의 ‘불편한 재미’와 시사점을 무게감 있게 받아들이는 논평은 없었다.

이번 ‘오스카 레이스’ 중 봉준호는 양극화 주제와 관련해 “혁명을 하자는 것인가” “선거에 나갈 생각이 있나”란 외국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그때 그는 “싸움의 대상이 모호해지면서 혁명은 멀어졌다. 현실의 복잡성을 영화에 담는다” “우리는 (정치 아닌) 예술에 미쳐 있다”고 답했다. 영화는 문제 제기를 할 뿐이고, 나머지는 현실의 몫이란 설명이다. 그 주체가 돼야 할 우리 정치권은 영화의 본질엔 별 관심 없이 ‘기생충’의 영광에 ‘기생’하며 묻어 가기에 분주하다. 어쩌면 이 모든 게 봉준호식 블랙코미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양성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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