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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57] ‘지피지기’로 위협에 맞선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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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18세기 말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유라시아 동안(東岸)에 다다른 러시아는 오호츠크해(海)를 남하하는 과정에서 일본과 맞닥뜨린다. 두 세력의 접촉은 순탄치 않았다. 1804년 통상 요구를 위해 일본을 방문한 북태평양 방면 개척단장 니콜라이 레자노프는 일본의 거듭되는 통상 거절에 격분하여 무력 위협 개항을 꾀한다. 1806년 레자노프 휘하의 군함이 사할린 소재 마쓰마에(松前)번 거류지를 습격하는 ‘로고(露寇)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의 러시아에 대한 경계감이 고조된다. 러·일 간 악연의 시작이었다.

1811년 쿠릴 열도 측량 임무를 수행 중이던 러시아 군함 디아나호의 바실리 골로프닌 함장을 비롯한 선원들이 구나시리섬(國後島)에서 일본 측에 의해 억류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들은 홋카이도의 마쓰마에, 하코다테(函館)를 전전하며 2년 2개월간 억류 생활 끝에 1813년 석방된다. 이 과정에서 두 나라는 여러 차례 협상을 진행하며 서로 알아가는 기회를 갖는다. 특히 막부는 일급 통사(通詞·통역관)를 동원해 골로프닌 일행으로부터 러시아어를 배우도록 하는 등 러시아의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웠다.

본국으로 귀환한 골로프닌은 1816년 자신의 억류 경험을 담은 ‘일본유수기(幽囚記)’를 출간한다. 일본판 ‘하멜표류기’인 셈이다. 이 책은 유럽인들에게 일본 관련 중요 정보로 간주되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등 번역판이 잇달아 출간되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1821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관장이 네덜란드어판을 반입하자 통사들이 이를 재빨리 번역하여 ‘조액일본기사(遭厄日本記事)’라는 책자를 간행한 것이다. 이를 통해 일본 위정자들은 일본을 바라보는 러시아의 시각을 엿볼 수 있었다.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포함하여 객관적으로 자신을 인식하려는 ‘자기 객관화’는 지피지기(知彼知己)의 핵심이다. 현대에도 통용되는 대외 관계 전략의 기초라 할 것이다.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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