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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종북 혐오 표현에 대한 피해 당사자의 종합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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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정희의 에 대한 서평

난민, 여성, 이주노동자, 장애인, 노인, 진보적 인사나 집단에 대한 혐오표현(hate speech)으로 한국 사회가 요동치고 있다. 이에 대해 여러 논의가 무성한 가운데 이정희 전 민주노동당 , 통합진보당 대표가 <혐오표현을 거절할 자유>(들녘)를 출간했다. 이 책은 '종북'이라는 혐오표현과 타자화의 실탄을 최전선에서 온몸으로 맞으며 그악한 꼴을 당하고 당의 사망선고까지 받아야 했던 피해 당사자의 피눈물 나는 보고서다. 이정희 전 대표는 혐오표현의 개념에서 시작하여 원인 분석을 하고 종북이란 혐오표현이 한국 사회에서 빚어낸 야만들을 신랄하게 고발한다.

이에서 그치지 않고 혐오표현을 규제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여러 사례를 검토하며 국제 규범에 비추어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통찰을 하고, 이를 없애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며 "지금 한국 사회에 사상의 자유시장이 필요하다면 그곳에서 보호되어야 할 것은 혐오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혐오표현을 거절하고 비판할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한다. 한국 사회에서 혐오표현의 자유는 넘쳐나는데 이를 거절할 자유는 보장해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욱 거센 혐오표현을 당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 책은 피해 당사자가 역사적 , 사회적 , 사법적 분석을 하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한, '종북이라는 혐오표현에 대한 종합보고서'다.

프레시안

70년 동안 제주 4,3의 피해자들에게 가해졌던 폭력이 통합진보당에 반복되다

이 책을 읽으며 계속 '제주 4,3민중항쟁'의 70여 년에 걸친 서사들이 겹쳐졌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1948년 남도의 양민 학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3만에서 8만 명의 양민들이 학살당했다. 자신의 가족과 친인척들이 아무런 죄가 없이 죽었음에도 남은 자들은 제사 때를 제하고는 그 어느 곳에서도 그 사실조차 말할 수 없었다. 참다못하여 발설한 이들은 '빨갱이'로 몰려 고문을 당하고 구속되었다. 이 사건을 <순이삼촌>이라는 픽션으로 재현한 작가 현기영조차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였고 소설은 오랫동안 금서가 되었다. 그러다가 50년이 더 지난 2,000년에서야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이어서 정부차원의 진상조사와 보고서가 발간되면서 이 사건은 비로소 사회 기억(social memory)에서 공식 기억(official memory)으로 전환하였다.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이를 기억하고 추념하면서 화해와 상생을 도모하자는 취지로 제주 4,3 평화공원이 세워졌다.

2018년은 마침 제주 4,3민중항쟁 70주년이어서 여러 행사가 열렸다. 그해 2월에 열린 '제주 4,3 7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에서 박명림 교수는 화해와 상생의 제주모델의 요체는 "① … 단 한 건의 상호보복과 폭력, 가해자-피해자 재충돌, 최소한의 법적 처벌조자 없이 관용과 상생의 절정의 모습을 보여준 화해 협력과 평화공존의 정신, ② 민관협력과 협치의 정신, ③ 진상규명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는 도내 단합과 … 가해자-피해자 … 사이의 연대-결속, ④ 지속성"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를 "제주 4,3치유 모델(Jeju 4,3 Model of Healing)' 등으로 명명해, 남남갈등 극복의 전거로 삼고, 남북분단 극복과 통일의 모델로 삼으며, 세계 분쟁 지역과 갈등 경험 지역의 과거사 극복의 모범적 전범으로 만들어가자"라고 제안하였다.(<제주 4,3모델의 전국화, 세계화, 보편화 - '세계 보편 모델'을 향한 시론>)

과연 그런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박명림 교수는 진보로 분류되는 학자임에도 진실의 왜곡에 바탕을 둔 거짓화해를 공론화하고 있다. 그의 주장과 달리 제주 4,3민중항쟁에 대한 진상규명과 진정한 화해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장 강력한 가해자인 미국은 사과조차 하지 않았으며 관련된 문건의 공개를 거부하며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 이 사건은 아직 이름도 얻지 못한 채 '제주 4,3사건'이라는 가치중립적인 용어로 명명되고 있다. 평화의 섬은 선전구호일 뿐이고, 강정에는 제주 전체를 전장터로 만들 수도 있는 군사기지가 들어섰다. 민주화 정권이 들어서서 많이 나아졌지만, 피해자들은 아직도 트라우마를 앓고 있고, 그 중 상당수는 아직도 진실을 말하기를 두려워한다.(이도흠, <제주 4,3민중항쟁에서 폭력의 양상과 공동체 복원 방안>, ) 한 후보자가 '완전한 진상규명과 배, 보상'을 2020년 4.15 총선에서 공약으로 내걸 정도다. 며칠 전에 우리공화당은 "제주 4,3사건은 남로당이 일으킨 폭동,반란"이라는 광고를 신문에 게재하기도 했다. 피해자들은 가해자들이 누리고 있는 권력이 두렵고 '뒷날'이 무섭기도 하고 후손들이 걱정되어서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고 있을 뿐이다.

이 제주 4,3학살의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70년 동안 가해졌던 여러 폭력 - 물리적 폭력, 문화적 폭력, 구조적 폭력, 재현의 폭력 - 들이 형식을 바꾸어서 통합진보당에 고스란히 행해졌다. 그때의 양민처럼 통합진보당은 철저히 배제되어 죽음을 당하고, 구성원들은 침묵을 강요당하였고, 촛불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화해와 상생은커녕 통합진보당의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저자의 말대로 인종, 민족, 국적에 의해 외부자를 차별하는 유럽과 달리 한국에서는 지금까지도 사상과 정치적 의견이 혐오표현의 핵심사유다. 이 땅에서 '빨갱이'나 '종북'의 명명은 무고한 사람을 누구나 죽여도 좋은 '호모 사케르(homo sacer)'로 규정하는 법이었다. "주권권력은 법을 매개로 어떤 개인을 이에서 예외로 설정하여 '벌거벗은 생명'을 창출한다."(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 주권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저자는 일제, 미군정, 독재정권으로 이어진 주권권력이 독립운동가,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민주화운동가, 호남사람, 노동조합원, 진보정당원, 진보적 지식인들을 빨갱이로 배제하여 구속하거나 살해한 한국의 현대사를 조망한다. 필자 세대만 하더라도 <반공도덕>이라는 교과목을 배웠으며, 당시 초등학생의 상당수가 북한에 도깨비들이 살고 있고 박정희 대통령을 비판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로 도깨비라고 여겼으며, 마을에 그런 대학생이 있으면 사람들이 마주치는 것조차 기피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수많은 민주화운동가와 학생들이 고문과 구속을 당하였으며, 그 중 상당수가 죽음까지 맞았다.

이를 바탕으로 저자는 "종북이라는 기표가 북을 환기시킴으로써 자신과 다른 모든 것들을 '종북'으로 몰아세우면서 대중의 분노를 이들에 대한 '공격적' 에너지로 바꾸어놓는 특징을 가짐"(박영균, <종북이라는 기표가 생산하는 증오의 정치학>)을 간파하고, 종북 표현의 공격적 특징으로부터 발생하는 정치적 효과와 사회적 결과에 주목한다. 그 정치적 효과는 조직결성이나 사회적 발언권 행사를 막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정치세력, 언론이나 대중들이 자신들도 그들처럼 배제될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인하여 이들을 감싸지 못하게 하는 데 있다. 이의 사회적 효과는 공론장에서 배제와 축출이다. 그러기에 저자는 어딘가에서 연락을 받으면 "폐가 되지 않을까요?"라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는 아픈 고백으로 책의 서장을 연다. 저자의 지적대로 아직도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철저하게 보장되지 않고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한국 사회에서 종북은 여성, 성소수자, 난민, 장애인에 대한 혐오표현이 논의될 때조차 그 담론에 끼지도 못할 정도로 철저히 배제되고 있다.

혐오표현은 인간의 존엄과 공존할 권리를 훼손한다

2008년에서 2016년에 종북에 대한 혐오와 배제가 극심해졌다. 종북이란 혐오표현은 극우세력이 집권하고 권력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정권 핵심의 공식 발언과 국가기관의 조직적 유포, 보수언론의 집중 보도를 통해 빠른 속도로 사회 전체로 확산되었다. 박근혜 정권은 민주노총, 전교조, 통합진보당을 없애는 것을 집요하게 추진하였고 여기에 보수언론과 단체가 호응하였다. 이에 따라 "67.7%가 종북 세력에 대해 심각하다"라고 여론조사에 답할 정도로 대중들의 종북 혐오도 심해졌다. 통합진보당 강제해산부터 시작하여 세월호 유가족 등 일반 시민에게까지 종북몰이를 하자 박근혜 정권의 지지율은 상승하였다.

저자의 지적대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드러나기 전까지, 종북몰이는 박근혜 정권을 만들어낸 묘책이었고 지지율 상승의 비결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결국 4,3의 희생자처럼 2014년 12월 19일에 통합진보당은 헌법재판소로부터 해산 판결을 받았다. 그 후 촛불항쟁이 일어났고 박근혜 정권이 탄핵되었고 민주정부가 들어섰다. 그럼, 종북의 혐오표현은 사라질까. 아니다. 저자는 북에 대한 혐오와 종북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남북관계가 악화하면 다시 심해질 것이라 예측한다. 문재인 정권은 통합진보당을 다시 살리라는 당원을 비롯한 진보진영의 목소리를 계속 외면하고 있다. 대법원은 2018년 10월에 극우매체의 종북 표현이 허위사실을 적시해 명예를 훼손한 것이니 손해배상을 하라는 이정희 대표의 청구에 대해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하므로 명예훼손이 아니라고 판결하였다.

저자는 혐오표현이 혐오폭력으로 이어지고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고 소수집단이 다수집단과 공존할 권리를 침해하기에 규제해야 한다고 본다. 여기에 필자가 한 가지를 더 추가하면, 혐오표현은 공론장을 붕괴시키기에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규제해야 한다. 인간은 누구든 어느 상황에 있든 인종과 종교와 사상을 떠나 존엄성을 가지며 타인, 사회, 국가는 이를 보장해야 한다.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를 가지긴 했지만, 사회를 구성하여 협력과 공존을 도모하면서 이타적 유전자도 발달시켰다. 협력과 공존은 사회의 전제다. 인류는 17세기 이후 교회 바깥에 공론장을 만들고 이곳에서 합리성에 근거하여 토론하면서 진리를 판별하고 합의를 도모하였으며 이것이 시민사회와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그런데 혐오표현은 인간의 존엄을 부정하고 때로 당사자들의 죽음이나 대량학살에 이르는 폭력을 야기하며, 소수자들을 집단에서 추방하고 배제하며, 토론과 합의는커녕 의제로 올리는 것조차 배척하여 공론장을 붕괴시켜서 결국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이에 저자는 율사답게 국제규범을 살핀 후 혐오표현을 정의하고 이에 대한 사법적 , 공동체적 대안을 제시한다. 이 책은 혐오표현을 "역사적 , 구조적 연원에 의해 형성된 다수집단이 소수집단과 그 구성원에 대한 배제 또는 축출을 주장하거나 정당화하며 차별하거나 적대하는 표현"으로 규정하고, 이를 표현의 자유로 보호하지 말 것을 제안한다. 혐오표현에 대한 형사처벌 범위는 좁게, 처벌 대상은 명확히 하되, 대신 민사상 구제 가능성은 넓게, 구제조치는 다양하게 인정하자는 것이다. 행동이 아닌 말과 표시를 규제하고 형사처벌은 최종적으로 보충의 제재로 가해져야 하므로, 형사처벌은 최소화해야 한다. 다만, 일반인의 말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갖는 '위로부터의 혐오 조장'을 막기 위하여, 공직자, 정당의 등록된 간부, 등록된 언론사 임직원의 혐오표현에 한해서는 단순유포도 처벌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이에 따라 민형사상 입법과 법리를 개발하고 자유규제와 구제조치, 차별금지법 제정이 뒤따라야 한다. 이 제안은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사상과 표현을 자유를 억압하는 혐오표현을 제재할 사법적 대안을 모색한 것이기에 합리적인 동시에 현실적이다.

피해자의 책임과 연대가 혐오표현이 없는 사회를 만든다

이 책은 사법적 대안 제시로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혐오표현을 절대 쓰지 않는 정치언어의 변화가 있어야 하고, 사회경제적 개혁이 수행되어야 함은 물론, '피해자의 책임'과 연대를 거론한다. 혐오표현이 줄어드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실제의 변화가능성은 피해자의 마음과 태도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더는 혐오표현이 퍼져나가지 못하도록 다수의 사람들이 손을 잡고 함께 막아낼 수 있어야만, 혐오표현의 주동자들은 혐오표현을 내려놓을 것이다. …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피해자들의 노력이 충분히 차오른 뒤에야, 그리하여 혐오표현을 막아낼 사람들이 가까이 함께 설 수 있어야 세상은 마침내 변할 것이다."

가장 최고의 명약은 그 병으로 아픔을 겪은 자가 만든 것이리라. 종북 혐오표현으로 가장 큰 고통을 겪은 이의 글이기에 이 책은 진정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설득하는 힘이 있다. 혐오표현에 관련된 방대한 문헌을 읽고 체계적으로 정리하며 10장에 걸쳐서 명쾌하게 원인을 분석하고 처방하며 대안을 모색한 것은 석학의 모습 같다. 부당하게 해산된 당의 대표로서 증오를 드러내지 않은 채 냉정하게 문제와 원인을 살피고 그 원인을 해소할 수 있는 법안을 제시한 것은 가장 최고 수준에 이른 율사만이 해낼 수 있는 솜씨다. 종북 혐오 표현의 피해자이면서도 피해자의 책임을 말하며 경미한 가담자와 방관자들과 연대를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포용의 정치인만이 이룰 수 있는 경지다.

대량학살의 근본 원인은 동일성이다그럼에도 읽기를 마쳤을 때 아쉬운 점이 남는다. 법적인 측면에 많이 치우치다 보니, 혐오표현에 대한 인류학적 , 철학적인 분석이 다소 부족했다. 좀더 체계적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왜 교양과 상식, 이성을 가장 잘 갖추고 보통교육이 실시된 20세기에 유태인 대학살, 난징 대학살, 킬링필드, 루완다 대학살 등 희생자가 수십만에서 수백만에 이르는 대량학살이 수시로 자행되었는가. 이의 원인에 대해,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아이히만 재판을 지켜보고서 '악의 평범성'과 '순전한 생각 없음'으로(<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은 '권위에 대한 복종' 때문이라 주장하였다.(<권위에 대한 복종>) 하지만, 아무런 생각이 없이 그저 조직에 충실한 아이히만에게 히틀러가 독일 우파 시민을 학살하라고 명령을 내렸어도 유태인에게 하듯이 별 거리낌 없이 이를 수행했을까. '생각 없음'보다, '권위에 대한 복종'보다 대량학살이나 집단적인 폭력을 야기하는 근본 요인은 '동일성에서 비롯된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이다. 백인 어린이는 때리지도 못하는 신부가 마야족이나 잉카족 어린이는 별다른 죄책감 없이 죽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이교도로 타자화/악마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류는 문명사회 이래 종족번식, 전염병, 종교, 이데올로기 등의 요인으로 동일성을 형성하고 다른 종족이나 다른 질병, 종교, 이데올로기를 가진 자들을 타자화하여 배제하고 폭력을 행하면서 동일성을 강화해 왔다. 그러기에 대량학살 이전에는 이들을 타자화하는 혐오발언이 선행한다. 정복 시대에 백인들은 유색인을 '하느님을 믿지 않는 짐승이나 야만인, 혹은 악마'로, 히틀러는 유태인을 '유럽의 정신을 훼손하는 반기독교도'로, 르완다의 후투족은 투치족을 '바퀴벌레'로 매도하는 혐오발언을 퍼트렸다. 학살은 그 후에 진행되었다. 제주의 4,3 학살에서도 육지/섬, 우익/좌익, 알뜨르(해안지역)/웃뜨르(중산간 지역)으로 나눈 채, 주로 전자로 동일화한 세력이 후자를 타자화하면서 학살하였다. 동일성은 '차이'를 포섭하여 이를 없애거나 없는 것처럼 꾸민다.

이에 대한 대안은 동일성에서 '차이(difference)의 사유'로, 이분법에서 대대(待對)의 논리로, 타자에게 폭력을 가한 근대적 주체에서 타자성(alterity)을 추구하는 탈근대적 주체로 전환하는 것이다. 차이는 동일성을 해체한다. 차별했던 이주노동자에게서 독일에 간호사로 갔던 내 누이의 모습을 발견하고 포옹하듯, 대대(待對)는 이것과 저것을 분리하는 A-or-not-A의 이분법적 모순율의 논리를 깨고 내 안에 대립적인 것을 서로 품으며 역동적으로 상생을 도모하는 A-and-not-A의 퍼지(fuzzy)의 논리다. 21세기의 바람직한 인간형은 이 세계의 의미를 올바로 해석하고 실천하는 근대적 주체와 공감을 매개로 타자에 대한 윤리를 실천하는 탈근대적 주체를 종합한 눈부처-주체다.(이도흠, <인류의 위기에 대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

소극적 자유에 적극적 , 대자적 자유를 종합해야이 책은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서양의 사상의 자유시장론을 분석하며 표현의 자유와 혐오표현에 대한 규제가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병존할 수 있음을 논증하고 이를 바탕으로 법률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소수의 현인(賢人)/철인(哲人)만이 진리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이나 그들이 인정하는 이에게만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부여한다는 권위주의를 해체한 것이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이나 존 밀턴(John Milton)에서 비롯된 사상의 자유시장론이라면, 이를 또 다시 극복한 것이 사회적 책임론이다. 자유로운 표현이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고 자본주의 체제에서 기업의 이윤추구와 결합하여 진리를 왜곡하고 공동체의 윤리를 저해하는 것을 성찰하여 사회적 책임론으로 발전하였다. 이러면서 자유 또한 구속과 억압에서 벗어나는 소극적 자유(freedom from)에서 노동과 실천을 통하여 진정한 자기실현을 하는 적극적 자유(freedom to)와 타자를 더 자유롭게 하는 순간에 자신의 자유를 진정으로 구현하는 대자적 자유(freedom for) 개념으로 발전하였다. 대자적 자유를 구현하는 순간 인간은 정의를 실천한다. 진보 진영이 자유의 개념을 보수에게 내주고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해서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핵심 원인 가운데 하나가 적극적 자유와 대자적 자유의 개념을 잘 응용하지 못한 데 있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소극적 자유에 치우친 사상의 자유시장론에 바탕을 둔 근대법 체계를 적극적 자유와 대자적 자유의 개념에서 비판하며 혐오표현을 규제할 법률적 대안을 마련했으면 더욱 진전된 제안을 하였을 것이다.

아울러, 종북 혐오표현을 야기하는 원인에 대해 좀더 포괄적으로 분석하고 이에 부합하는 대안을 제시했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종북 혐오표현을 야기하는 것은 분단모순과 남북관계, 신자유주의 체제, 대미 종속 체제, 기득권 동맹의 권력욕, 6.25 기억투쟁의 실패, 반공교육, 노동배제,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보수양당 체제, 보수언론의 조작, 진보의 분열 등이다. 그러기에 그 대안 또한 멀리로는 신자유주의와 대미종속체제를 극복하고 남북한 평화체제를 수립하고 노동중심의 사회를 이룩하는 것이며, 가까이로는 이를 지향하는 가운데 기득권 동맹에 균열을 내는 운동을 끊임없이 하고 교육개혁과 노동개혁, 정치개혁을 수행하고, 6.25에 대한 기억투쟁을 올바로 하며, 언론과 정치인의 혐오표현을 규제하는 법을 실시하고, 진보정당이 통합하여 헤게모니를 갖는 것이다.(이도흠, <종북 프레임의 극복 방안>)

우리가 성찰할 것들

왜 대중들이 혐오표현에 가담하는가. 왜 자신의 형제와 자식, 부모가 아무 죄 없이 학살당하였음에도 제주도민은 저항하기는커녕 가해자의 편에 서고 반공국민으로 거듭나기를 했는가? 주로 공권력이 양민을 학살하였지만 제주도민이 서로 죽이기도 하였다. "제주도민은 민보단, 향토자위단, 해병대에 입대하고 자진하여 반공대회의 동원에 응하였으며, 자신의 딸을 경찰과 군인 등 우익 인사에게 시집을 보내고 심지어 빨갱이라는 낙인을 지우기 위해 다른 지역의 빨갱이까지 죽였다."(양정심, 「제주 4,3항쟁과 레드콤플렉스」) 일본에서도 관동 대지진 때 일본 천민이 가장 악랄하게 조선인을 학살한 이유는 일본 주류로부터 '일본인'으로 인정받기 위함이었다.(藤野裕子, <2차 세계대전 전의 일본의 토목건축업과 조선인 노동자(戰前日本の土木建築業と朝鮮人勞働者)>)

이들 사례에서 잘 볼 수 있듯, 피해자들이 권력을 가진 가해자들의 동일성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서 살아남으려는 일종의 인정투쟁을 한 때문이다. 여기에 레드 콤플렉스가 구성한 불안이 폐쇄된 공간에서 비슷한 정보와 아이디어가 돌고 돌면서 강화되고 악순환을 일으키는 반향실효과(echo chamber effect)을 일으키면서 집단적 공포로 증폭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혐오표현이 대중의 폭력으로 전환하는 다양한 요인과 과정에 대한 분석, 혐오표현이 구조적 폭력으로 작동하면서 문화적 폭력과 재현의 폭력을 생산하는 면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

필자는 이명박 정권에서 당시 '진보의 궤멸'을 극복하고자 진보 진영의 대통합을 시도하였다. 민교협의 의장으로서 통합진보당 잔류파와 탈당파, 진보신당, 민주노총을 비롯하여 진보진영의 정당과 진보단체, 주요 진보인사에게 17대 대통령 선거를 맞아 범진보 단일 후보를 내는 '노동자 , 민중후보 추대 연석회의'를 제안하고 십여 차례에 걸쳐 전체 회의를 주재하고 물밑교섭을 하였다. 첫 회의를 갖기도 전에 통합진보당 잔류파가 들어오면 회의에 참석조차 하지 않겠다는 이들이 있어서, 고민 끝에 첫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잔류파의 대표로 참석한 인사에게 민주주의를 훼손한 것에 대해서만 다른 정당과 단체 대표에게 사과할 것을 요청하였는데 통합진보당 잔류파에서도 여러 차례 회의를 한 끝에 수용되지 못하였고, 결국 통합진보당 잔류파는 이 회의에서 이탈하였다. 이에 민주노총도 마지막 회의까지 참석했지만, 여러 차례 내부 회의 끝에 참여단체로 전환하지 못하고 참관단체로만 머물렀다.

결국 대통합은 실패했다. 진보당 잔류파가 이정희 후보를 내자 통합진보당 탈당파가 심상정 후보를 냈고, 진보신당이 김순자 후보, 변혁ㆍ노동자 그룹 등 노동좌파진영이 김소연 후보를 냈다. 설혹 통합진보당이 모두 옳았다고 하더라도 대승적으로 사과하였으면 다른 결과가 빚어졌을 수도 있었으리라 본다. 모택동의 말대로 물 없는 곳에 물고기가 살 수 없다. 왜 통합진보당이 많은 대중을 놓치고 진보진영마저 함께 하지 못하는 내적 요인은 없었는지에 대한 성찰도 한 장 정도 할애하였다면 맨 마지막의 '피해자의 책임'이 더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통합진보당이 성찰할 것이 1이라면 진보진영을 포함하여 우리가 성찰할 것은 100이다. 미국의 연방대법관인 벤저민 카도조(Benjamin N. Cardozo)가 1937년 팔코 대 코네티컷 재판에서 판결한 대로 "표현의 자유는 다른 모든 자유의 모체이자 절대 필요한 조건"(<Palko vs. Connecticut, 302 U.S.>)이다. 이것이 보장되지 않는 한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통합진보당의 해산은 이를 전면 부정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 혐오표현의 가담자나 방관자로서 통합진보당의 해산에 일익을 하였다. 촛불 이후에도 서민과 노동자의 삶에 변화가 없는 것은 크게 다섯 가지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유지되고, 대미종속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본-정권-보수언론-사법부-종교권력층-김앤장과 같은 전문가'로 이루어진 기득권 동맹이 조금도 균열되지 않았으며, 문재인 정권도 반노동 , 친미 , 친재벌을 지향하면서 진정한 사회개혁을 하지 않고 있고, 시민사회의 조직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저자의 지적대로 남북의 갈등이 고조되면 종북의 혐오 표현이 다시 기승을 부리고, 이는 다양한 폭력, 곧 물리적, 문화적, 구조적, 재현의 폭력으로 이어질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사법부는 재심을 수용하고, 문재인 정권은 통합진보당을 복원해야 한다. 우리 또한 피해자들의 절규에 연대하여 통합진보당을 복원함은 물론, 혐오표현이 없는 사회를 건설하는 데 적극 동참해야 한다.

기자 : 이도흠 한양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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