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1 (토)

[세계의 창] 희망을 잃은 나라의 민주주의 / 야마구치 지로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야마구치 지로 ㅣ 호세이대학 법학과 교수

지난해 홍콩에서는 일국양제와 시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시민의 싸움이 벌어졌다. 최근 대만 총통 선거에서는 홍콩 시민의 싸움에 자극을 받은 사람들이 대만의 자유와 자립을 내건 차이잉원 총통을 압도적인 표로 재선시켰다.

민주주의는 근대 서양에서 시작된 정치 구조라고 여겨져왔다. 그러나 지금은 동아시아에서도 정착됐다. 한국도 민주화 이후 30년 이상이 흘러서 여러 가지 고민은 있는 듯하다. 하지만 시민이 적극적으로 행동해 부패한 정권을 무너뜨리는 힘을 발휘한 것은, 일본에서 볼 때는 부럽다고 느낀다. 정치뿐 아니라 문명 일반에 관해 ‘발전한 서양, 뒤떨어진 아시아’라는 도식이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인의 머릿속에 계속 있었지만, 지금 미국과 영국에서는 혼란스러운 민주주의가 아시아에선 작동하고 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뒤 아시아에서 최초로 의회정치를 시작해 긴 역사의 정당 정치를 갖고 있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뒤 일본의 민주화는 크게 발전됐다고 일본인은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현실을 보면 일본이 아시아에서 민주주의의 선두를 달리고 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지난해 11월 아베 신조 정권은 근대 일본 헌정사상 최장수 정권이 됐다. 그러나 장기집권에 따른 부패와 교만이 만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지난해 가을 국회에서는 정부 주최 ‘벚꽃을 보는 모임’(벚꽃 모임)에 아베 신조 총리 지역구 지지자가 대거 초대돼 공금으로 술과 음식을 대접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벚꽃 모임은 각계 공로자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한 행사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아베 총리 후원회는 지지자를 대상으로 도쿄 여행을 기획해왔다. 정치가가 사비로 지지자들을 벚꽃놀이에 초대해 술과 음식을 대접하면 공직선거법 위반이다. 정부 주최의 공적 행사이기 때문에 선거법 위반은 될 수 없다는 것이 지금 정부의 설명이지만 보통 시민들에게는 석연치 않은 얘기다.

한 사람당 접대 금액이 대단한 액수는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금액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자의 준법정신에 대한 문제다. 벚꽃 모임에는 사기적 상술로 형사적 책임까지 추궁당하고 있는 인물이 초대된 적도 있고, 벚꽃 모임에 초대된 점을 선전에 이용한 사실도 밝혀졌다. 이러한 이유로 벚꽃 모임 초대자 명단을 밝히고 적절한 예산 집행이 이뤄졌는지 검증해야 한다는 야당의 추궁이 있었지만, 정부는 명단을 파기했다고 버티며 진실 해명을 거부하고 있다.

이 외에도 카지노를 포함한 종합리조트 시설 설치를 둘러싸고 전 국토교통성 부대신이 뇌물을 챙겼다고 해서 체포됐다든지, 전 법무상 부부의 관계자가 선거법 위반 혐의로 수사를 받는 등 스캔들이 속출해 아베 정권은 상처투성이인 상태다.

그러나 의외라고 해야 할까? 일본의 여론은 들끓고 있지 않다. 한국 법무부 장관 검찰 수사에 대해서는 일본 텔레비전 와이드 쇼도 떠들썩하게 다뤘지만, 자국의 전 법무상 사건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추궁하지 않고 있다. 1월 여론조사를 봐도 내각 지지율은 제자리걸음 또는 오히려 약간 상승했다. 사람들은 정치 스캔들에 대해 화를 내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그 이유는 일본인 다수가 ‘정치는 변하지 않는다’, ‘아베 이외에 정권을 맡길 정치가는 없다’고 포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9년 민주당 정권 탄생 때까지는 일본인은 정치를 바꿔 더 좋은 사회를 지향하자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동일본대지진을 거쳐 민주당 정권이 붕괴하자 사람들은 정치 변화에 대해 비관적이거나 냉소적이 됐다.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것은 정치의 힘으로 자신과 아이들에게 좀더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과 낙관이다. 경제가 정체되고 인구가 계속 감소하는 일본에서는 특히 젊은이들이 희망을 잃고 있다. 지금과는 다른 사회가 있을 수 있다는 희망을 환기하는 것이 야당의 일이다. 정치에 대한 환멸에 있어서는 일본이 아시아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이 사태를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다.

▶네이버에서 한겨레 구독하기
▶신문 보는 당신은 핵인싸!▶조금 삐딱한 뉴스 B딱!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