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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목)

[일사일언] 번스타인과 수퍼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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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백윤학 지휘자·영남대 교수


미술 이론을 전공하는 선배와 이야기를 나눴다. 미술 작품을 감상하면 구체적인 무언가가 머릿속에서 연상되는데 음악은 그렇지 않아 사람들이 어려워한다고 했더니 그는 음악의 그런 추상성이 오히려 부럽단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빨간색을 보면서 지평선을 물들인 저녁놀, 바쁜 나를 멈추게 한 야속하지만 고마운 정지 신호등, 모닥불의 따뜻함 등을 떠올린다. 음악은 다르다. '도'라는 소리는 공기의 물리적 진동일 뿐. 일상에서 들을 수 있는 새소리나 물 흐르는 소리, 자동차 경적 소리, 아기 울음소리와 연결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대(大)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해설과 지휘를 겸했던 '청소년 음악회' 중 한 장면이다. 번스타인이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친구를 구하는 수퍼맨 이야기를 음악으로 들려준다. 수퍼맨이 등장할 때, 수퍼맨이 모터사이클을 타고 친구를 구하러 갈 때, 친구가 감옥에서 수퍼맨에게 신호를 보낼 때, 감옥 안에서 졸고 있는 사람들의 음악을 맛보기로 들려준 뒤 전체 곡을 지휘한다. 멋지게 '수퍼맨'을 연주한 번스타인은 그러나 방금 들은 곡은 사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돈키호테'이고, '수퍼맨'은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이며, 악당을 무찌르는 수퍼맨은 돈키호테, 감옥에 갇힌 친구는 산초, 졸고 있는 사람들은 양 떼가 새근새근 자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실토(?)한다. 번스타인이 같은 곡을 다시 한 번 관객에게 들려주지만 이제 관객들은 같은 곡을 들으면서도 '수퍼맨'이 아닌 '돈키호테'를 떠올린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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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우기면 틀린 거다. 하지만 작곡가가 '돈키호테'라 이름 붙인 곡을 듣고 '수퍼맨' 이야기가 더 어울린다 해도 틀린 건 아니다. 음악을 듣고 자기 나름의 상상을 하는 재미는 온전히 듣는 사람의 몫이다.

그래서 많은 음악 작품에는 구체적인 제목이 없는 건지도 모른다. '교향곡 1번' '소나타 3번'처럼 지루하고 딱딱한 제목 위에 나만의 느낌으로 이름 붙여 보시길. 어느새 음악이 내 곁에서 꽃으로 피어나는 행복을 느낄 것이라 약속 드린다.

[백윤학 지휘자·영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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