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30 (화)

[정인진의 청안백안 靑眼白眼]사법개혁 어디까지 왔나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소송제도 일부를 개선하자고 만든 위원회에 어느 법과대학 교수가 외부위원 자격으로 참석했다. 간사의 브리핑이 끝나자 그 교수가 물었다. “그래서, 이 제도로 국민에게는 어떤 혜택이 돌아간다는 겁니까?” 딱히 대답할 말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 발언이 좀 생뚱맞다 싶었고 솔직히 듣기 싫었다. 그 기억은 변호사로서 법정의 운영 실태를 보면서 미안함으로 바뀌었다. 개선이든 개혁이든 관청에서 하는 일은 그 신선함이 국민에게 피부로 느껴져야 하는 것이다.

경향신문

지난 10월 초 한겨레신문 강희철 기자가 쓴 기사에는 판사들이 김명수 대법원장을 ‘어대’라고 부른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어쩌다 대법원장’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정권이 바뀌면서 새로 공무원이 된 사람들 중 상당수는 선거캠프 등에 있다가 어쩌다 공무원이 된 사람이라는 뜻의 ‘어공’이라고 부른다더니, 거기에 빗댄 듯하다. 사법부 수장에 대한 호칭 치고는 점잖지 못한데, 문제는 판사들의 그에 대한 인식이 그 정도라는 데 있다. 어공의 문제는 무능함과 도덕적 해이다.

김 대법원장은 취임사에서 “오늘 저의 대법원장 취임은 그 자체로 사법부의 변화와 개혁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글쎄, 언사가 과했지만, 법원이 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서 그래도 기대를 걸었다. 그럼 사법개혁은 어디까지 왔나. ‘장차 사법농단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해서 사법개혁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는 없을 게다. 사법부의 책무가 그저 ‘농단하지 않기’는 아니지 않은가.

모든 조직, 특히 공적 조직이 수행하는 기능은 제도와 운영의 두 가지 면에서 보아야 한다. 운영은 잘되어도 제도가 발목을 잡기도 하고, 제도는 잘되어 있어도 운영이 시원치 않을 때도 있다. 운영의 변화를 말한다면 인적 구성의 변화는 개혁의 첫 신호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김 대법원장의 발언은 옳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후 조직의 운영에 변화가 없다면, 인적 물갈이는 그저 권력이동 이상의 의미가 없다. 김 대법원장 취임 후 법원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다시 말해서 국민이 법원에 가서 받는 재판은 얼마나 좋아졌는가.

김 대법원장이 취임사에서 사법신뢰 회복방안으로 꼽은 네 가지 과제 중 상고심 제도의 개선을 보자. 상고사건은 2018년 통계로 4만8000건에 조금 못 미친다. 대법관 중 재판에 관여하는 인원은 12인인데, 공휴일을 제한 1년의 근무일수를 250일로 보고 주심인 대법관 1인이 하루에 처리해야 할 건수를 계산하면 16건이다. 귀신이 아니고서야 심도 있고 국민이 만족할 만하게 처리하기는 불가능할 게다. 퇴직한 어느 재판연구관의 말로 대법원은 이미 ‘파산 중’이다. 민사, 가사, 행정 사건의 대다수가 ‘상고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요지의 네 줄짜리 이유를 단 심리불속행 판결을 받는다. 전체 상고사건 대비 심리불속행 판결을 받는 비율은 2016년 이래 모두 70%를 상회하고 2018년에는 76.7%에 이르렀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혐의사실 중 하나인 ‘사법거래’는 상고법원 신설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가 사법권 독립을 해치고 재판에 간섭했다는 것을 요지로 하고 있다. 방법의 정당성은 차치하고, 적어도 그가 상고심 개선을 위해 국회와 대통령실을 상대로 온갖 노력을 다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만큼 상고심 재판의 개선은 절박한 과제였다. 현임 대법원장은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 과거에 시행했다가 실패한 상고허가제나, 이미 오명을 뒤집어쓴 상고법원 설치는 더 이상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일이 많으면 일하는 사람을 늘리는 것이 당연한 해법인데, 대법관 수를 대폭 늘리는 방안에는 전원합의체 운영이 어렵다는 핑계를 대며 외면한다. 취임 2년이 지나도록 뭔가 시원한 해결책은 제시된 일이 없다.

김 대법원장이 제시한 다른 과제 중 국민 생활에 직접 영향이 있는 것으로는 재판의 충실화가 있다. 그의 취임 이래 재판은 얼마나 충실해졌을까. 이런 걸 정량화하기는 어렵다. 다만 사건 처리율에 관한 통계가 있다. 2019년에 발간된 사법연감을 보면, 전체 사건 중 처리된 사건이 접수된 사건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말하는 처리율은 2009년 지수 기준으로 2017년의 100.6에서 2018년의 99.6으로 떨어졌다. 민사사건은 118.2에서 112.9로, 형사사건은 100.1에서 99.9로, 행정사건은 132.9에서 129.9로, 가사사건은 100.0에서 97.8로 떨어져 모조리 하향세다. 전년도 대비 전체 사건 접수 건수가 약 3% 적어졌는데도 그렇다.

처리율의 감소가 반드시 재판의 충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상당수 재판부가 차회 재판기일을 다음 다음 달로 건너뛰어 잡는다는 변호사들의 불만을 들으면서, 또 요즘엔 합의재판부가 결성되면 매주 선고할 건수부터 미리 합의해 둔다는 말을 판사들에게서 들으면서 느끼던 불안감이 단순한 인상을 넘어 수치로 나타난 것이다. 예측컨대 2019년의 통계치는 더 나빠질 것이다. 법률신문의 지난 8월26일자 사설도 재판의 질이 점점 낮아지고 재판의 과정과 결과의 충실도가 떨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법발전위원회와 의견 대립이 있고 나서 김 대법원장이 만든 사법행정자문회의가 3개 분과위원회를 구성한 것은 취임 2년이 된 지난 10월이다. 그가 해 온 개혁이라는 것, 굼뜨고 어정쩡하다. 이래도 되는가.

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 장도리 | 그림마당 보기

▶ 경향신문 최신기사

▶ 기사 제보하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