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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월)

[기자수첩] 헌법 위에 표준계약서?…공정위의 이상한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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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비즈



"하도급업체의 게임 개발인력을 원사업자(대기업)가 채용해 인력 유출로 힘들어하는 곳이 많습니다. 그래서 채용을 못하도록 하는 조항을 넣었습니다. 다른 업종의 표준하도급계약서도 같은 조항을 만들었습니다." -공정거래위원회 관계자-

지난달 24일 공정거래위원회가 ‘게임용소프트웨어개발구축업종’에 대한 표준하도급계약서를 새로 만들어 발표할 때 공정위는 원사업자가 수급사업자(하도급업체)의 직원을 채용하지 못하도록 한 규정을 정했다. 헌법(제15조)에서 보장한 ‘직업 선택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하는 것은 아니냐는 질문에 공정위 관계자는 인력유출로 힘들어하는 하도급업체를 생각한 조치라고 말했다.

공정위는 이번에 게임용소프트웨어개발구축업종에 관한 표준하도급계약서를 신설하면서 기존에 있던 상용소프트웨어유지관리업종과 정보시스템유지관리업종의 표준하도급계약서에도 같은 내용의 조항을 새로 만들었다.

이날 만들어진 표준하도급계약서의 내용을 보면 원사업자는 하도급업체가 부도나 파산 등 경영상의 위기로 인력구조조정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곳에서 일하는 사람을 채용하지 못한다. 회사가 망할 정도의 위기가 발생하지 않는 한 하도급업체에 속한 직원을 원사업자가 채용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공정위 관점에서 보면 하도급업체의 인력유출을 막아주기 위한 선의(善意)의 조치일 수 있다. 하지만 개인의 권리 차원에서 보면 심각한 문제다. 아무리 능력이 있는 직원도 이 표준하도급계약서에 묶여 원사업자인 대기업에 채용될 기회가 원천적으로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공정위의 한 고위 관계자는 "표준하도급계약서의 적용을 받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직업 선택의 자유가 침해된다고 생각할 것 같다"고 했다. 박정수 법무법인 지평 변호사도 "근로자의 권리 측면에서 볼 때 직업 선택의 자유에 중대한 침해 소지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600명 안팎의 공정위 직원 절대 다수는 법학과 경제학을 전공한 행정고시(국가직 5급 공채) 출신이다. 대부분 헌법, 민법, 행정법 시험을 통과해 공직에 입문했다. ‘경제검찰’을 자처할 정도로 공정한 시장경제를 저해하는 행위에 대해 엄정한 법적 판단을 내린다는 자부심도 높다. 헌법적 가치를 침해하는 사안을 표준하도급계약서에 쉽게 집어넣는 것이 경제부처 중에서도 가장 법적 전문성을 갖춰야하는 공정위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

정해용 기자(jhy@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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