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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50] 孫文과 미야자키 도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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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미야자키 도텐(宮崎滔天·1871~ 1922)은 메이지 시대 일본의 사상가이다. 그는 신분 사회를 타파하고 농지를 경작자에게 분배함으로써 인민의 자유와 생존권을 보장하는 ‘농본적 민본 사회’를 꿈꿨다. 도텐의 사상은 일본을 넘어 동아시아적 맥락에서 혁명의 의미와 실천 방안을 모색하는 아시아주의로 확장된다. 특히 중국 인민들이 청조(淸朝)를 타도하고 서구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동아시아 민본 혁명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상하이·홍콩·톈진 등 중국 각지를 여행하고, 손문·강유위·장개석·김옥균 등 개혁가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동아시아 건설을 위한 민족 간 연대 추구에 생을 바친다. 도텐의 꿈은 1911년 신해혁명으로 열매를 맺는다. 도텐은 손문과 '적성우의(赤誠友誼·거짓 없는 진정한 우정)'를 나눈 신해혁명의 동지이자 숨은 공로자였다.

1897년 이래 망명객 신세였던 손문은 좀처럼 혁명 추동(推動)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1902년 도텐이 자신과 손문의 혁명을 향한 꿈과 좌절을 기록한 '33년의 꿈'이라는 책을 저술한 것이 뜻밖의 전기(轉機)를 마련한다. 이 책이 (손문의 본명인) '손일선(孫逸仙)'이라는 제목으로 중국에서 출간되면서 혁명 세력 사이에서 손문의 인지도가 급상승한 것이다. 1905년 손문 주도로 도쿄에서 결성된 혁명 지도부 '중국동맹회'에도 도텐의 후원이 있었다.

1922년 도텐이 세상을 떠나자 상하이에서 추도식이 열린다. 식을 주재한 손문은 ‘도텐이 없었으면 신해혁명도 없었을 것’이라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난징(南京) 중국근대사박물관에는 손문과 나란히 걷고 있는 도텐의 동상이 서 있다. 중국인들은 국적을 초월하여 중국 변혁의 불쏘시개가 되어준 이 일본인에게 지금도 경의를 표한다. 근현대 중·일 관계사는 단순하지도 일방적이지도 않다. 거기서 연유하는 복잡 미묘한 역사 감각을 선악 이분법 역사관으로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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