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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1 (토)

마산으로 번진 “유신철폐” 함성…박정희 독재, 최후를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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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민주항쟁 40돌-그날의 기억]

10월22일 ‘거사’ 준비한 경남대생들

부산 소식에 나흘 앞당겨 시위 돌입

학교 휴교령에 격분 1000여명 모여

3·15탑 모여 거리시위, 시민들 가세

유신정권, 20일 마산 전역에 위수령

6일 뒤 박정희 유신독재 막을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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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 3·15탑 앞에 다시 모여서 데모를 합시다!”

1979년 10월18일 오후 3시30분께 거리로 나가 시위를 벌이려던 경남대생 1000여명은 경찰 병력에 막혀 교문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었다. 이때 국어교육학과 3학년생 최갑순과 옥정애가 “3·15탑에서 모이자”고 소리쳤다.

‘3·15탑’은 1960년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마산 3·15의거를 기념하는 탑이다. 학생들은 순식간에 흩어져, 후문으로도 가고, 학교 뒷산으로도 가고, 학교 담장을 넘기도 했다. 모두의 목적지는 3·15탑이었다. 수백명의 경찰도 사방으로 흩어지는 학생들을 막을 방도는 없었다.

1979년 10월18일 오후부터 10월20일 새벽까지 이어진 ‘마산 항쟁’은 이렇게 출발했다.

경남 마산(현 창원시)의 경남대생들은 9월 초부터 대규모 시위를 차근차근 준비했다. 대체로 2개 조직이 준비했는데, 첫번째 조직은 최갑순(국어교육학과 3년), 옥정애(국어교육학과 3년), 정성기(경제학과 3년), 이윤도(경영학과 3년), 신정규(국제개발학과 3년) 등이 주축이었다. 또 다른 조직은 정인권(국제개발학과 2년), 박인준(법학과 2년) 등 법정계열 학생들이었다. 이들 두 조직은 중간고사일인 10월22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함께 시위를 준비했다. 그러나 10월16일 부산에서 시위가 일어나면서, 날짜를 앞당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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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는 최갑순(63)씨는 “유신독재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비겁하다는 생각에, 밤에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래서 유인물이라도 만들어 시민들에게 돌려야겠다는 생각에 시위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부산 시위 소식은 다음날인 17일 경남대에 알려졌다. 18일 아침 경남대 안 학도호국단 사무실 앞 정자나무, 도서관 입구 벽, 월영지 등 3곳에서 시위를 선동하는 ‘경남대학생 제위’ 명의의 격문이 발견됐다. “독재자 박정희 파쇼 물러가라! 박정희의 앞잡이 공화당을 말살하자”고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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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를 직접 비판하는 격문이 학내에 나붙었다는 사실은 입소문을 타고 학생들 사이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부산 시위 상황까지 알려지면서 경남대 학내는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오전 11시부터 수업 거부에 들어갔다.

9월부터 시위를 준비하던 정인권은 학과 대표들을 찾아다니며 “오후 1시30분 노인정 앞 잔디밭에 모여 애국가를 부르며 데모를 하자”고 제안했다. 시위를 준비했던 이들 중 한명인 정성기(61) 경남대 경제금융학과 교수는 “노인정은 도서관 앞에 큰 나무 한그루가 있는 공터인데, 주로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나이 많은 학생들이 모여서 쉬던 곳이라서 그렇게 불렀다”고 설명했다. 당시 도서관이 있던 자리엔 현재 교양융합대학이 들어서 있는데, 노인정은 지금도 그대로 있다.

학교 당국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오후 2시15분께 휴교를 결정하고, 오후 2시18분 교내 방송으로 휴교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휴교령 소식에 학생들은 더욱 흥분했고, 오후 3시께엔 1000여명의 학생이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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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30분께 정인권은 학생들을 대학 정문 쪽으로 이끌었다. 학생들은 어깨를 겯고 애국가를 부르며 행진했다. 이미 정문 앞에는 경찰 수백명이 배치돼, 학생들이 거리로 나서는 것을 막았다. 학생들은 “언론 자유” “민주 회복” “유신 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서려 했으나 경찰의 벽을 뚫을 수 없었다.

최갑순과 옥정애의 제안으로 경남대생들이 오후 5시께 3·15탑에 다시 모였을 때, 경찰도 이미 시위대를 진압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다시 여러 갈래로 흩어져 마산의 중심가인 창동으로 향했다. 저녁 6시를 넘어서면서 퇴근시간과 맞물렸다. 시내를 가득 메운 시위대 때문에 시내버스들이 운행을 못 하고 멈춰 섰다. 퇴근하던 직장인들이 버스에서 내려 시위대에 합류했다. 저녁 8시께엔 마산수출자유지역 노동자들까지 퇴근하며 시위대에 합류했다. 어둠이 짙어진 저녁 8시30분께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시위대는 비를 맞으면서 애국가를 부르고 “유신 철폐” 구호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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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인근 창원·진해·고성·함안경찰서에서까지 지원을 받아 935명을 시위 진압에 투입했다. 밤 9시50분께에는 육군 39사단 병력 627명이 투입됐다. 군인들은 대검을 꽂은 M16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장갑차 3대도 배치됐다. 밤 11시 직후 진해에 주둔한 해군까지 출동했다.

시위대는 제일 먼저 지역 국회의원인 공화당 소속 박종규의 집으로 몰려가서 돌을 던졌다. 박종규는 박정희 경호실장을 지낸 인물이었다. 또 공화당 사무실 유리창을 깨고, 현판을 뜯어내 불태웠다. 양덕·산호·북마산·회원·자산·남성파출소도 불타거나 부서졌다. 시위는 다음날 새벽 2시께까지 계속됐다.

19일 내무부는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이던 야간통행금지 시간을 마산에만 밤 10시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로 연장했다. 마산 지역 모든 대학은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다. 공수특전사 1개 여단과 진해 해군 등 군병력도 추가로 투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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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19일 저녁 6시께부터 창동에서 다시 시위가 시작됐다. 시위대는 어깨를 겯고 거리 행진을 하며 “유신 철폐” “민주 회복” “학원 자유” 등 구호를 외쳤다. 최루탄과 돌멩이가 머리 위로 날아다녔지만, 시위는 다음날 새벽 3시께까지 계속됐다.

박정희 유신정권은 10월20일 낮 12시 마산 전역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경찰 대신 군인이 치안을 맡았다. 위수사령관으로 임명된 육군 제39사단장은 마산 전역에 군병력을 배치했다. 마산경찰서에 갇혀 있던 수백명의 시민은 10월27일 새벽 경찰서 관내 방송으로 박정희가 자신의 심복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로써 ‘마산 항쟁’은 막을 내렸고, 유신독재도 종말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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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29일 작성된 마산경찰서 수사보고서 등을 보면, 마산 항쟁에서 연행된 사람은 506명이다. 이 가운데 60명이 구속됐고, 125명이 즉심에 넘겨졌으며, 321명이 훈방됐다. 구속된 60명은 모두 3~12일 동안 불법구금 상태에서 고문당하며 조사를 받았다. 게다가 47명은 10월27일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는 바람에 군 검찰로 넘겨져 군사재판을 받았다.

또 10월18일 저녁 일을 마치고 귀가하던 유치준(당시 51살)씨가 마산수출자유지역 부근에서 경찰에게 두들겨 맞아 목숨을 잃었다. 경찰은 유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유씨의 주검을 암매장했다. ‘국무총리 소속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는 40년이 흐른 지난달 5일에야 그를 부마민주항쟁 관련 사망자로 인정했다.

당시 경찰은 부마민주항쟁을 북한 지령에 따른 것으로 왜곡하려 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시위대가 사제 권총을 사용했다고 조작했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그 어떤 것도 증명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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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갑순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장은 “부마민주항쟁은 박정희가 자초한 것이었다. 만약 박정희가 10월26일 김재규의 손에 죽지 않았다면,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됐을 것이고, 시민들이 직접 유신독재를 끝장내고 민주정부를 세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산/최상원 기자 cs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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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부마민주항쟁 10주년 기념 자료집>(1989)

이은진, <1979년 마산의 부마민주항쟁>(2008)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보고서>(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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